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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상과 현실/ 시로 여는 에세이

검지 정숙자 2012. 9. 13. 16:40

 

    

    무료한 날의 몽상

      -無爲集 2

 

      정숙자

 

 

  막대기가 셋이면 <시>자를 쓴다

  내 뼈마디 모두 추리면 몇 개의 <시>자 쓸 수 있을까

  땀과 살 흙으로 돌아간 다음 물굽이로 햇빛으로 돌아간 다음 남은

뼈 오롯이 추려

 시 시…… ..…

  이렇게 놓아다오

  동그란 해골 하나는 맨 끝에 마침표 놓고 다시 흙으로 덮어다오

  봉분封墳일랑 돋우지 말고 평평하게 밟아다오

  내 피를 먹은 풀뿌리들이 짙푸른 빛으로 일어서도록 벌레들 날개가

실해지도록…

  가지런히 썩은 <시>자를 이슬이 먹고 새들이 먹고 구름이 먹고 바람

이 먹고…

  자꾸자꾸 먹고 먹어서 천지에 노래가 가득하도록…

  독을 숨기고 웃었던 시는 내 삶을 송두리째 삼키었지만 나는 막대기

둘만 있으면 한 개 부러뜨려 <시>자를 쓴다

  젓가락 둘 숟가락 하나 밥상머리에서도 <시>자를 쓴다

  못 찾은 한 구절 하늘에 있어 오늘도 쪽달 허공을 돈다

 

 

 

     몽상과 현실

 

 「무료한 날의 몽상-無爲集2」, 발표한 지 어느덧 10년이 되었다.『시와 사람』2003-겨울 호에 실렸으니 작문일자는 당연히 그 이전일 것이다. 다시 읽어본즉 제2의 내가 제3의 나를 대하는 것만 같다. 그리고 제1의 나는 여전히 “막대기 둘만 있으면 한 개 부러뜨려 <시>字를”쓰고자 하는 백면서생(白面書生)이다.

  백면서생. 이런 자평을 내리고 보니 불행 중 다행이다. 등단 이후, 아니 등단 이전부터 “막대기가 셋이면 <시>字를” 썼고, “젓가락 둘 숟가락 하나 밥상머리에서도 <시>字를” 붙들었으나 누구의 이목도 집중시키지 못한 채 머리가 희었으므로…, 희라! 백면서생이라는 수사가 합당하지 아니한가. 꾸미지 않은 얼굴로 글만 들여다보는, 글로 세월을 보냈기에 세상 물정 모른다는 의미의 백면서생. 그 뜻에 얼비친 제2, 제3의 나는 물론이려니와 제1의 나 역시 홀로 드리우는 그늘이 조촐하고 청랑하다.

  오늘도 나는 만년 서생임에 감사한다. 서생의 노력이란 늘 제자리걸음에 불과한 물결이지만 그 물결이나마 썩거나 마르지 않고 살아있어야 가능한 덕목이기 때문이다. 노력은 이미 노력으로써 충만하고, 노력은 이미 노력으로써 빛을 발하며, 노력은 이미 노력 자체가 수확이요 풍요다. 막대기 셋을 얻어 고민하는 자의 백면을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시에티카』2012-제7호 <시에티카 시로 여는 에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