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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범고래/ 장석주

검지 정숙자 2012. 6. 13. 13:41

 

 

       늙은 범고래

 

       장석주 著, 동화『독도 고래』중 한 챕터

 

 

  외뿔이는 세상 천지에 저를 돌봐줄 아무도 없는 고아가 되었습니다. 외뿔이를 돌봐준 것은 동해의 늙은 범고래입니다. 늙은 범고래는 자애로워서 모든 어린 고래들의 할머니 노릇을 했습니다.

  "슬프니?"

  외뿔이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엄마는 저를 사랑하지 않았을까요? 그랬으니 저를 떼놓고 떠났겠지요?

  "네 엄마는 너를 누구보다 사랑했단다.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네가 잘 알고 있지. 살아 있는 것들에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거란다. 단지 그게 언제 닥치느냐의 차이가 있을 따름이지. 땅에서나 바다에서나 떠나고 되돌아오는 일이나 죽고 사는 것은 늘 있는 일이란다. 너도 언젠가는 이 물을 떠나야 한단다. 활짝 피어난 꽃은 반드시 져야만 하는 것과 같은 이치지. 그래야만 열매를 맺을 수 있으니까. 열매는 땅에 떨어져 썩어야만 그 씨앗이 새로운 싹을 틔울 수 있지. 세상의 생명들은 그렇게 돌고 돈단다. 그걸 운명의 순환이라고 하지. 너는 그 운명을 거스르지 말고 받아들여야 해."

  "운명이라고요?"

  "그래. 하늘은 오래되고 땅은 옛것이지. 그 하늘과 땅만큼이나 오래된 것이 바다란다. 바다는 고래 식구들이 살아온 터전이지. 네가 고래 종족의 일원으로 태어난 것은 바다가 곧 네 운명이 되었다는 걸 뜻한단다."

  늙은 범고래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자에로웠습니다. 그 자애로운 목소리도 외뿔이의 격한 슬픔을 달래지는 못했지요.

  "정어리에게는 정어리의 길이 있고, 고래에게는 고래의 길이 있단다. 너는 고래의 길을 가야겠지. 너는 고래니까 조류의 흐름을 배워야 하고, 그 조류를 타고 물속에서 유영하는 법을 배워야 해. 그리고 네 생존을 위해서 작은 물고기들을 사냥하는 법을 스스로 익혀야 한단다. 알겠지?"

  길이라니! 물속에 무슨 길이 있단 말인가요? 바다는 그저 무한하고  평평할 뿐 아닌가요! 외뿔이는 눈을 감았습니다. 바다 속의 길들을 상상했습니다. 땅이 그 속에 광맥(鑛脈)들을 숨기고 있듯 물속에 숨어 있는 무수한 고래의 길들을!

  "저 바다 너머의 땅에는 길들이 있고 바다 속에도 바다의 길이 있단다. 네가 훌륭한 고래가 되려면 가야 할 길과 가지 않아야 할 길에 대한 분별이 있어야 하지. 가야 할 길은 가야만 하는 길이고, 가지 말아야 할 길은 죽어서도 가서는 안 되는 길인 거야."

  "저는 어떤 고래가 될까요?"

  " 네 앞에는 하나의 삶이 아니라 너무 많은 삶이 있단다. 너는 많은 실수와 실패를 겪을 것이고, 앞으로 좋은 고래들과 나쁜 고래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 너는 단 하나의 삶을 살게 될 거야. 아마도 너는 다른 고래들이 존경하는 멋진 고래가 될 거다."

  외뿔이는 눈을 감고 미래의 날들을 상상했습니다. 그 순간 바다에서는 저 열대의 화려한 꽃들이 뿜어내는 방향(芳香)이 가득 찬 듯 느껴졌습니다. 외뿔이는 늙은 범고래의 가슴 아래 지느러미에 가만히 등을 부볐습니다.

  "진짜 네가 가야 할 길은 숨어 있단다. 그건 영혼의 지도 속에만 나타나지. 그 길을 찾도록 해라. 그 길만이 너를 더 특별하고 위대한 존재가 되게 이끌 것이다."

  늙은 범고래도 엄마와 같이 그 영혼의 지도에 대해 말했습니다. 외뿔이는 엄마가 말했던 것처럼 영혼의 지도를 떠올렸습니다. 아주 따뜻하고  슬프고 아름다운 봄날이었습니다. 외뿔이에겐 이별이 있었고, 그건 그가 넘어서야 할 슬픔의 벼랑이었습니다. 외뿔이의 앞날에는 새로운 날들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 동화 『독도 고래』(그림-이두식,현재 홍익대 교수)에서/ 2012.5.15 <동화출판사/문학의문학>펴냄

  * 장석주/ 충남 논산 출생, 1979 《조선일보》신춘문예-시,《동아일보》신춘문예-문학평론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