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 없는 시집
오정국
그 일생의 기억을 여기에 바쳐
지상에 남겨진
한 권의 책
담벼락의 흙덩어리가 떨어진 듯하다
그 얼굴과 이름을 익히 알고 있는데
영문 모를 부음 같은 책갈피를 펼치면
천둥 울고 비 내리고
다시 젖는 흙길들
쉼표, 말줄임표, 말없음표의 발자국을 짚어나가면
마침표가 없다
천둥벼락처럼 꼬리를 잘라 먹고
문장 안쪽으로 휘감기듯 사라진
구두점, 애당초 시 문장엔 마침표가 없었다는 듯
문잔 너머의 문장으로 되돌아간
캄캄절벽 허공이여, 높고
외로워라, 절벽은 제 앞길을 끊어서
절벽이 되었어라
구르던 돌들 거기에 얹어두고
담벼락의 풀꽃들 그대로 남겨두고
일몰의 그늘에 몸을 적시는
책갈피, 상처 입은 자리가 환한 길이라는 비유
몰아쉬던 숨을 잠시 멈추듯
저 상처와 흉터가
내 살갗과 한 몸을 이루는
오늘 이 순간의 장엄한 일몰을
아 아 무심코 섣불리 수락할 수 없구나
두 눈 뜨고 당한 게 어디 세월뿐이겠느냐만
이름 하여 유고 시집
그 어떤 물질의 덩어리인 것이냐
내 이렇게 말 더듬어 읽어가는
혀끝 마르는 고통을 저릿하게 깨워놓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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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사사』 2021-가을(107)호 <이 계절의 신작시 1>에서
* 오정국/ 1988년『현대문학』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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