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서명 없는 시집/ 오정국

검지 정숙자 2022. 5. 17. 01:14

 

    서명 없는 시집

 

    오정국

 

 

  그 일생의 기억을 여기에 바쳐

  지상에 남겨진

  한 권의 책

 

  담벼락의 흙덩어리가 떨어진 듯하다

 

  그 얼굴과 이름을 익히 알고 있는데

  영문 모를 부음 같은 책갈피를 펼치면

  천둥 울고 비 내리고

  다시 젖는 흙길들

  쉼표, 말줄임표, 말없음표의 발자국을 짚어나가면

  

  마침표가 없다

  천둥벼락처럼 꼬리를 잘라 먹고

  문장 안쪽으로 휘감기듯 사라진

  구두점, 애당초 시 문장엔 마침표가 없었다는 듯

 

  문잔 너머의 문장으로 되돌아간

  캄캄절벽 허공이여, 높고

  외로워라, 절벽은 제 앞길을 끊어서

  절벽이 되었어라

  구르던 돌들 거기에 얹어두고

  담벼락의 풀꽃들 그대로 남겨두고

 

  일몰의 그늘에 몸을 적시는

  책갈피, 상처 입은 자리가 환한 길이라는 비유

  몰아쉬던 숨을 잠시 멈추듯

 

  저 상처와 흉터가

  내 살갗과 한 몸을 이루는

  오늘 이 순간의 장엄한 일몰을

  아 아 무심코 섣불리 수락할 수 없구나

 

  두 눈 뜨고 당한 게 어디 세월뿐이겠느냐만

  이름 하여 유고 시집

  그 어떤 물질의 덩어리인 것이냐

  내 이렇게 말 더듬어 읽어가는

  혀끝 마르는 고통을 저릿하게 깨워놓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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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사사』 2021-가을(107)호 <이 계절의 신작시 1>에서

  * 오정국/ 1988년『현대문학』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