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이 운다 외 1편
오탁번
파랑은 왼쪽 귀
빨강은 오른쪽 귀
앙증한 보청기를 끼고
시집을 펴서 읽으면
책장 넘길 때마다
고라니가 가랑잎 밟으며 달려가고
소낙비에도 도토리가 막 떨어진다
바람 부는 휴양림 숲속
호젓한 산책길에 나선 것 같다
죽어서 종이가 된 나무가
천년의 잠을 깬다
시집이 운다
눈으로 읽는 시보다
귀로 듣는 나무의 울음소리가
더 시답다
멧갓에서 벌목하는 소리도
쩡쩡 웽웽 아주 잘 들린다
-전문(P.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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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사랑
경주 여고 교장 시절
평교사들은 수업 들어가고
교장실에 혼자 남은 시인은
-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느니라
구구절절 사랑이 넘치는 연서를 썼다
어린 사동이 커피를 끓여주는
햇빛 잘 드는 교장실은
연서 쓰는 장소로도 최고였다
사동은 하루 걸러 우체국으로 뛰어갔다
1967년 2월 청마 유치환이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서울에서도 장례 버스가 출발하였다
장례식이 장엄하게 진행되는데
에꾸나!
하관을 하는 순간
소복을 한 처자 하나이 울며불며
무덤으로 막무가내 뛰어들었다
장례식을 마치고
버스가 서울로 돌아오는 길
버스 안은 내내 적막이 흘렀다
내가 죽으면
잘 죽었다 앓던 이 빠졌다 하겠지
다들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누구보다도 청마를 잘 모신
고려대 영문과 김종길 교수의
설의법 레토릭에 의해서
그날 버스 안의 풍경이
얼마 후에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 버스 안이 왜 그토록 조용했는지 아나?
아무도 대답을 못하자
교수가 뜸 들이지 않고 말했다
- 배가 아파서!
달빛을 베는 검객의 한 말씀!
시인은
그렇게 사랑하는 거다
여느 시인들 죄다 부끄럽게 해놓고
그렇게 죽는 거다
연서를 5000통이나 쓸 수 있는
청마 같은 시인 어디 있으면
좀 나와 보시지 그래
-전문(P. 85-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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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비백飛白』에서/ 2022. 4. 20. <문학세계사> 펴냄
* 오탁번/ 1943년 충북 제천 출생, 1966년《동아일보》신춘문예로 동화 부문 & 1967년《중앙일보》신춘문예로 시 부문 & 1969년《대한일보》신춘문예로 소설 부문 등단, 시집『아침의 예언』『생각나지 않는 꿈』『1미터의 사랑』『벙어리장갑』『오탁번시전집』『손님』『알요강』, 문학선·시선집『순은의 아침』『사랑하고 싶은 날』『밥냄새』『눈 내리는 마을』, 창작집 『처형의 땅』『내가 만난 여신』『새와 십자가』『절망과 기교』『저녁연기』『혼례』『겨울의 꿈은 날 줄 모른다』『오탁번 소설』전6권, 산문집『현대시의 이해』『오탁번 시화』『시인과 개똥참외』『헛똑똑이의 시 읽기』『벙어리 시인』『두루마리』/ 한국시인협회 평의원, 고려대 명예교수, 대한만국 예술원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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