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시집이 운다 외 1편/ 오탁번

검지 정숙자 2022. 5. 14. 03:02

 

    시집이 운다 외 1편

 

    오탁번

 

 

  파랑은 왼쪽 귀

  빨강은 오른쪽 귀

  앙증한 보청기를 끼고

  시집을 펴서 읽으면

  책장 넘길 때마다

  고라니가 가랑잎 밟으며 달려가고

  소낙비에도 도토리가 막 떨어진다

  바람 부는 휴양림 숲속

  호젓한 산책길에 나선 것 같다

 

  죽어서 종이가 된 나무가

  천년의 잠을 깬다

  시집이 운다

  눈으로 읽는 시보다

  귀로 듣는 나무의 울음소리가

  더 시답다

  멧갓에서 벌목하는 소리도

  쩡쩡 웽웽 아주 잘 들린다

        -전문(P. 37)

 

    ---------------

    시인의 사랑

 

 

  경주 여고 교장 시절

  평교사들은 수업 들어가고

  교장실에 혼자 남은 시인은

  -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느니라

  구구절절 사랑이 넘치는 연서를 썼다

  어린 사동이 커피를 끓여주는

  햇빛 잘 드는 교장실은

  연서 쓰는 장소로도 최고였다

  사동은 하루 걸러 우체국으로 뛰어갔다

 

  1967년 2월 청마 유치환이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서울에서도 장례 버스가 출발하였다

  장례식이 장엄하게 진행되는데

  에꾸나!

  하관을 하는 순간

  소복을 한 처자 하나이 울며불며

  무덤으로 막무가내 뛰어들었다

  장례식을 마치고

  버스가 서울로 돌아오는 길

  버스 안은 내내 적막이 흘렀다

  내가 죽으면

  잘 죽었다 앓던 이 빠졌다 하겠지

  다들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누구보다도 청마를 잘 모신 

  고려대 영문과 김종길 교수의

  설의법 레토릭에 의해서

  그날 버스 안의 풍경이

  얼마 후에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 버스 안이 왜 그토록 조용했는지 아나?

  아무도 대답을 못하자

  교수가 뜸 들이지 않고 말했다

  - 배가 아파서!

    달빛을 베는 검객의 한 말씀!

 

  시인은

  그렇게 사랑하는 거다

  여느 시인들 죄다  부끄럽게 해놓고

  그렇게 죽는 거다

  연서를 5000통이나 쓸 수 있는

  청마 같은 시인 어디 있으면

  좀 나와 보시지 그래

     -전문(P. 85-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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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비백飛白』에서/ 2022. 4. 20. <문학세계사> 펴냄   

  * 오탁번/ 1943년 충북 제천 출생, 1966년《동아일보》신춘문예로 동화 부문 & 1967년《중앙일보》신춘문예로 시 부문 & 1969년《대한일보》신춘문예로 소설 부문 등단, 시집『아침의 예언』『생각나지 않는 꿈』『1미터의 사랑』『벙어리장갑』『오탁번시전집』『손님』『알요강』, 문학선·시선집『순은의 아침』『사랑하고 싶은 날』『밥냄새』『눈 내리는 마을』, 창작집 『처형의 땅』『내가 만난 여신』『새와 십자가』『절망과 기교』『저녁연기』『혼례』『겨울의 꿈은 날 줄 모른다』『오탁번 소설』전6권, 산문집『현대시의 이해』『오탁번 시화』『시인과 개똥참외』『헛똑똑이의 시 읽기』『벙어리 시인』『두루마리』/ 한국시인협회 평의원, 고려대 명예교수, 대한만국 예술원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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