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벌초/ 오탁번

검지 정숙자 2022. 5. 14. 02:29

 

  벌초

 

  오탁번

 

 

  동네 노인 하나가

  선산 벌초를 하고 내려오는데

  여태 벌초도 안 한

  먼저 떠난 이웃의 무덤이 보인다

  추석이 낼모레인데

  아무리 바빠도 벌초를 안 하다니!

  고얀 녀석들 같으니!

  혀를 끌끌 차면서

  쓱쓱 낫질을 한다

  살아생전에 논물 먼저 대려고

  삿대질도 한 밉상이었지만

  깎은머리가 된 무덤이

  저녁놀 아래 정겹다

 

  추석날에야 고향에 온 이웃 아들은

  누가 벌초를 했는지 금방 안다

  추석날 저녁에 달이 떠오르자

  곶감 한 상자와 술 한 병 들고

  고맙다는 인사를 간다

  그런데 인사받는 노인의 말이

  참 싱겁기도 하다

  - 내가 한 게 아녀

    지나던 꼴머슴이

    풀을 싹 깎은 거라

 

  앞산 하늘에 토끼 한 마리

  방아 찧다 배꼽 잡는다

     -전문-

 

  해설> 한 문장: 그의 이번 시집은 천진성의 시학과 비근대 시법에 의해 발원된 것으로서 그야말로 순은純銀이 빛나는 아침으로부터 뉘엿하게 기울어가는 해거름까지 지내온 순수 회귀의 미학을 미덥게 펼쳐간 사례로 남을 것이다. 때로 '방울-울타리'의 고요함으로, 때로 '창-수레'의 역동성으로, 천천히 낡아가거나 사라져가는 것들을 온 정성으로 기록해가는 '시간의 필경사'로서, 오탁번 시인은 뒤를 돌아보면서도 앞을 예시하는 역설의 시학을 한없이 지속해갈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과 마음의 고고학을 하염없이 들려줄 것이다. 앞으로도 그 세계가 참으로 아늑하고 아득하게 펼쳐가기를, 마음 깊이 희원해본다. (p. 시 26/ 론 173-174) (유성호/ 문학평론가, 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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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비백飛白』에서/ 2022. 4. 20. <문학세계사> 펴냄   

  * 오탁번/ 1943년 충북 제천 출생, 1966년《동아일보》신춘문예로 동화 부문 1967년《중앙일보》신춘문예로 시 부문 & 1969년《대한일보》신춘문예로 소설 부문 등단, 시집『이 아침의 예언』『생각나지 않는 꿈』『1미터의 사랑』『벙어리장갑』『오탁번시접집』『손님』『알요강』, 문학선·시선집『순은의 아침』『사랑하고 싶은 날』『밥냄새』『눈 내리는 마을』, 창작집 『처형의 땅』『내가 만난 여신』『새와 십자가』『절망과 기교』『저녁연기』『혼례』『겨울의 꿈은 날 줄 모른다』『오탁번 소설』전6권, 산문집『현대시의 이해』『오탁번 시화』『시인과 개똥참외』『헛똑똑이의 시 읽기』『벙어리 시인』『두루마리』/ 한국시인협회 평의원, 고려대 명예교수, 대한만국 예술원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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