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이라는 고양이 외 1편
송재학
그냥, 이라는 육체에 도달했다 뭐해 그냥 있어 괜찮아 그냥 견딜 만해 그냥은 톡톡거리며 고양이처럼 가볍지만, 식육목의 안면을 굳이 감추지 않는다 아프진 않아 두통이 있지만 참을 거야 그럴 때 그냥은 붉은 혀를 내민다 그냥은 가끔 수화이기도 하다 그냥이라는 동심원이 아니더라도 그냥은 자주 갸웃거린다 서어하다는 말을 그냥 뱉곤 한다 그냥 일주일에 한 번 그냥은 민감한 수염이 있다 저녁에 만날까 그냥 집에 있을래 길고양이와 그냥의 눈동자는 불안한 세로이다 그냥은 그늘 잠이나 풋잠을 즐긴다 발톱을 부끄러워하는 그냥, 이라는 나이테는 구불구불하다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말아줘 얼굴만 한 햇볕이라도 쬐어야 체온이 유지되는 그냥이다 옥상에서 떨어져도 그림자 혼자 툭툭 말없이 일어날 그냥이다 그냥의 수염은 길고양이가 붙드ㄹ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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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루의 사전
신기루가 사막 가운데 나타나려면 호수가 등장해야 한다 이야기 속의 호수가 신기루였다면 신기루 또한 허공의 입김만은 아니다 눈동자가 변신한 입, 입이 달라진 눈동자의 호수를 거듬거듬 들어올리는 사막은 친수성이다 수만 번의 갈증을 견디는 오아시스 때문에 초식동물인 양 호수는 되새김질을 반복하고 있다 떠나고 돌아옴은 싫지 않는 역할이다 우리가 놓치는 생각 중 하나가 신기루가 되어 사막에 제 몸을 빌려주었던 호수가 떠나고 난 뒤 그 자리에 또 어떤 호수가 자리잡는가 하는 것이다 잠시 신기루였다가 되돌아오면서 시퍼렇게 멍든 호수는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제자리로 찾아오는 것일까 기록에 의하면 순례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말라버린 호수는 점점 늘어나고 있다 신기루는 호수의 생멸 일부이다 사막의 기억은 사라져버린 호수를 찾아서 현재의 모든 호수와 연결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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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아침이 부탁했다, 결혼식을』에서/ 2022. 5. 3. <문학동네> 펴냄
* 송재학/ 1955년 경북 영천 출생, 1986년『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시집『얼음시집』『살레시오네 집』『푸른빛과 싸우다』『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기억들』『진흙 얼굴』『내간체內簡體를 얻다』『날짜들』『검은색』『슬프다 풀 끗혜 이슬』등, 산문집 『풍경의 비밀』『삶과 꿈의 길, 실크로드』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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