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음 외 1편
최정란
이제 흘려보내요 고요히 우는 얼룩들을
처음 떠나온 곳으로, 오래 미끄럽게 헤맨 비누처럼
마땅히 가야 할 곳으로, 울퉁불퉁한 거품처럼
흘려보내요
간절히 보내고 싶지 않더라도
그들이 한때 우리에게 말없이 와서
눈물로 지은 소금기둥을 적시며 정답게
곁을 지켰더라도
한 세월 머물렀더라도
우리와 오래 눅눅한 한 몸이었더라도
땀 냄새 짜디짠 시간이 그립더라도
여전히 서로의 심장을 다 알지 못하더라도
아직 할 말이 강물처럼 남아 있더라도
길거리 웅덩이에서 흘낏 눈이 마주치더라도
애써 아는 척하지 말아요
대신 거품이 나도록 문지르며
미끄러운 비누의 세례를 부지런히 내려요
거품이 잘 일지 않더라도
그들이 아주 깨끗이 떠나지 않더라도
미워하지 말아요
가장 아끼는 흰 블라우스에 미적거리며
희미한 그림자로 우리 곁에 남아
우는 날이 많았던 이번 삶의 증거를 문득문득 보여줄지라도
순진무구한 불행들이
아무 일도 없었던 표백되는 삶은 아니라고
아무리 깨끗이 빠져나가 잊으려 해도
모든 순간은 보이지 않는 얼룩으로 남는다고
빗방울무늬 왕관무늬 표백되는 얼룩이 떼 지어 꽃의 이름으로
다정하게 울부짖더라도
끝까지 다할 수 없는 최선인 것처럼
끝까지 누릴 수 있는 은밀한 슬픔인 것처럼
햇볕이 쉬지 안고 꽃을 늙게 하더라도
나무들 새 얼룩을 묵은 가지마다 일제히 내놓은
꽃나무와 꽃나무 사이,
길게 빨랫줄을 매고
흰 빨래를 널어 말려요
얼룩이 바래기를, 너무 늦지도 너무 빠르지도 않게
다음 생이 오기를
오로지 성실하게 기다려요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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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거소녀 삐삐
늦은 밤 골목을 돌며 논다 노인이 리어카를 끌며 논다 불 꺼진 빈 상자를 펼치며 납작납작 논다 비탈진 올막을 밀며 비틀비틀 논다 노세 노세 노세 노동요를 노새처럼 끌며 논다
노래하는 새들이 노인을 놀리며 논다 밥이 노인을 차리면 논다 노는 입이 거미줄을 치며 논다 이 빠진 노래가 조인을 읊조리며 논다 흘러간 앨범 속 파노라마가 노인을 펼치며 논다 슬픈 일 기쁜 일 아픈 일이 노인을 논다
시간과 잘 노는 사람, 시간을 잘 놀려야 하는 사람, 지나간 시간을 천천히 되새김질하는 사람, 시간이 날 때마다 병원놀이를 하는 사람, 병과 정들어 병원놀이도 마음대로 못하는 사람, 노을이 깊어 놀 일이 바쁜 사람
노인이 가장 잘하는 놀이 기다리는 놀이, 기약 없이 하염없이 바쁜 놀이, 한가해서 더 바쁜 놀이, 노인이 논다 오지 않는 뼈와 살을 기다라며 논다 미처 오지 않은 먼 바깥을 기다리며 논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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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독거소녀 삐삐』에서/ 2022. 5. 3. <상상인> 펴냄
* 최정란/ 경북 상주 출생, 2003년 《국제신문》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장미키스』『사슴목발애인』『입술거울』『여우장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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