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키색
한윤희
채도 낮은 영혼, 오래된 그림
듬성듬성 빈자리 빈 데를 채워가는 붓질
선과 선을 지운다
사람과 병이 스미고 스민다
카키색은 모란디*의 병, 병과 병, 그 뒤에 병, 그 옆에 병, 겹겹으로 늘어서 있다 병과 병이 부딪는 소리, 너와 네가 부딪는 소리 몸 가리고 밖을 살피다가 다시 병 안으로 깊이 숨어든다. 입안에 머금고 있는 말들 병 안으로만 가라앉히는, 가라앉아 울부짖는, 바닥에서부터 올라온 작고 낮은 목소리, 새벽의 침묵같이 물이 끓는다
붓 움직이기 전
점과 선들이 마른 천 위에 조용히 쏟아내는
말, 어쩌면 당신은 그런 말인지 몰라
저 병들 너머 보이지 않는 말할 수 없는
-전문-
* 이탈리아 화가. 병(Bottle)의 화가로 불린다.
해설> 한 문장: 그렇게, 오래된 그림이 있다. 채도 낮은 영혼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그 그림에는 "사람과 병이 스"미고 있다. 조명을 떼어 내면서 시선을 포갠다. 병이, 병과 병 사이에 놓여 있는 것인데, 각각의 표정은 손에 닿을 듯하면서도 멀리 있다. 병이 있고, 그 뒤에 병, 그 옆에 병이 겹겹이 늘어서 있다. 그것은 집합이 아니다. 단독의 무언가가 자신의 고독을 간직한 채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사태다. 더욱이 그림을 감싼 카키색이 잠시 '병'에서 떨어져 단절된 것처럼 보인다. 이탈리아의 화가 모란디가 붓을 놓고는 갑자기 자신의 그림 앞에 서 있는 관람객에게 말을 건네는 듯했기 때문이다. "병과 병이 부딪는 소리, 너와 내가 부딪는 소리 몸 가리고 밖을 살피다가 다시 병 안으로 깊이 숨어"들었기 때문이다.
*
그림은 오래된 채 그곳에 있다. 단지 시간의 표식만이 그 출처를 각인할 뿐이다. 그러나 그 냄새와 질감은 여전하다. 시인은 병 안으로 숨어든 카키색의, 묘한 끌림에 매료된 채 그림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림과의 '간격'조차 무의미해졌다. '하얀빛 가루'가 흩어지면서 그림을 조금씩 밀어낸다. 그러나 '나'는 입속에 가득 담긴 '말'들을 저 병에 쏟아부을 것이다. 병 안으로만, 오직 병 안으로만 가라앉힐 것이다. "가라앉아 울부짖는, 바닥에서부터 올라온 작고 낮은 목소리"를 황혼과 죽음을 넘어서까지 기념할 것이다. "붓 움직이기 전/ 점과 선들이 마른 천 위에 조용히 쏟아내는/ 말", 그것은 문장이고 시다. 저 병들 너머에 존재하는 결코 보이지 않으며 말할 수도 없는 그 '말'들이 시인의 생生을 지금까지 밀고 왔으니,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p. 시 88/ 론 134-135) (박성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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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뜨거워지는 사각 침묵』에서/ 2022. 4. 15. <코드미디어> 펴냄
* 한윤희/ 서울 출생, 2005년『문학시대』로 등단, 시집『물크러질 듯 물컹한』, 공저『숨비소리』『열한 개의 페르소나』『문파 대표 시선』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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