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하루치의 나/ 신용목

검지 정숙자 2022. 5. 3. 02:31

 

    하루치의 나

 

    신용목

 

 

  보았어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에

  어제 거울 속으로 들어갔던 웃음이 약한 불 위에서 끓는 죽처럼 조금씩 흘러내리는 것을

 

  거울에 찍힌 내 손자국이 어둠에 다시 찍히는 것을

 

  보았는데, 아무도 믿지 않는다

  또 저런다!

  모두의 걱정이 나를 끌고 다닌다

  어둠이 내 몸에 부엌을 들이고 밥을 끓이고 어제의 나를 불러 끼니를 건네는데

 

  좀 그만해! 모두의 역정이 어제의 나를

  자꾸 굶겨서

  말라비틀어진 잠과 말라비틀어진 꿈, 오늘밤 어둠은 빈손으로 돌아간다 아무것도 먹지 못한다

  말라비틀어진 채

 

  보았어요, 밤새 거울을 닦는 어둠의 손

  아무도 믿지 않지만 

 

  보았어요, 꿈을 세제로 풀어 내 몸을 돌려 닦다가 문득 내 텅 빈 머리를 헹궈

  물을 받아서는

  벌컥벌컥 배를 채우고, 남은 물을 아무렇게나

 

  개수대에 버리고, 내 머리를 몸 위에 가지런히 엎어두고 가는

  가난한 어둠을

 

  보며, 나는 빨간 고무장갑 끝에 조금씩 고이다가 한참 만에 한 방울씩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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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지션』 2022-봄(37)호 <POSITION 4/ 신작시> 에서

  * 신용목/ 2000년 『작가세계』로 등단, 시집『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바람의 백만 번째 어금니』『아무 날의 도시』『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나의 끝 거창』『비에 도착하는 사람들은 모두 제 시간에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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