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고광식_현상을 치유하는 착란의...(발췌)/ 죽음의 집 : 조연호

검지 정숙자 2022. 5. 1. 03:04

 

    죽음의 집

 

    조연호

 

 

  하늘이 녹물처럼 붉게 일었다. 모든 기억이 한 개의 덩어리였어. 새들이 신중하게 생명 이전으로 날아간다. 나는 다기점茶器店에서 기다리는 애인을 데리러 슬리퍼를 끌고 자취방을 나와 좁은 골목 낮은 담벽을 걸었다. 벽지는 썩고 벽은 자꾸 물을 품고 달관한 듯 세상 쪽으로 기울었다. 그 벽 한구석에 나는 달력 대신 뭉크의 판화(죽음의 집)을 붙여놓았다. 창밖은 비극적 세계관이지 않은가. 죽은 사람을 흰 천으로 덮어놓고 여자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끌칼이 지나간 자리로 매섭게 파인 바람이 불어온다. 나는 되도록 자세하게 어둠과 대추나무와 이름 없는 마룻바닥들에 대해 말하려고 애썼다. 아니, 나는 바닷가로 가서 뜨거운 모래 위에 수많은 바다거북의 알을 낳고 행복하게 죽어가고 싶었다.

    -전문-

 

  ▶ 현상을 치유하는 착란의 순간들(1)/ 조연호의 시(발췌)_고광식/ 시인, 문학평론가

  이성적인 감각으로 볼 때 해가 지는 저녁 무렵은 붉은 노을로 아름답다. 서쪽 하늘에 꽃들이 만개하여 나부끼는 것 같기도 하고, 새들이 붉은 꽃밭을 날갯짓으로 흩트리며 날아가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시적 화자는 이성적인 감각을 무너뜨린다. 시각을 착란시키자 "하늘이 녹물처럼 붉게"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착란의 상태는 "모든 기억이 한 덩어리였어."라는 깨달음을 얻게 만든다. 이제 이 집은 편히 쉴 수 없는 공간이 돼서 달력이 필요 없다. 따라서 화자는 벽에 "달력 대신 뭉크의 판화(죽음의 집)을" 걸어놓았다. 그러자 실재하는 집은 죽음의 이미지로 꿈틀대기 시작한다. 집 안과 집 밖의 세계가 서로 맞물려 죽음을 연주한다. 실재하는 존재는 창을 통하여 "죽은 사람을 흰 천으로 덮어놓고 여자가 손으로 입을" 가리는 허구의 존재와 마주한다. 이성과 착란이 맞물리자 화자는 바다거북처럼 죽고 싶었다.

 

 현상의 민낯을 껴안는 시인의 착란이 아름답고 슬프다. 은폐의 베일을 벗고 포획된 현상은 사물을 품에 안고 있다. 더는 은폐하고 싶지 않은 표정이다. 이때 시인이 현상을 보는 시각은 착란된 상태이다. (p. 시 150-151/ 론 151)

 

   ----------------

  * 『예술가』 2021-겨울(47)호 <계절비평>에서 

  * 고광식/ 1990년『민족과문학』으로 시 부문 & 201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문학평론 부문 등단, 시집『외계 행성 사과밭』

'잡지에서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족등照足燈*/ 이난희  (0) 2022.05.02
백야/ 정혜영  (0) 2022.05.02
제야/ 김영주  (0) 2022.05.01
왼쪽 채널/ 이재훈  (0) 2022.05.01
백신 보고서 1 외 세 편/ 이채민  (0) 2022.0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