슥
안차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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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치오 폰타나, <제로>, 1960 (블로그주: 이 그림 부분은 책에서 감상 바람)
이쪽과 저쪽을 동시에 보는 자의 눈빛을 보라. 망설임이나 독백이 얼마나 화려한 유채색인지, 빛과 어둠을 나누는 침묵의 칼날이 슥,
캔버스를 가로질렀다. 루치오 폰타나의 그림 <제로>는 가슴뼈의 위쪽과 우심방의 아래 부위가 슥, 베어졌다. 찢긴 선 사이로 검은 어둠이 담즙처럼 차오른다.
이제 피 따위는 흘리지 않아. 세상 사람들은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 슥, 베어진 시간의 검은 구멍을 들여다본 자와 보지 못한 자. 슥, 끊어진 크레바스에 한 발을 디밀어 넣은 자와 넣지 않은 자. 슥, 벌어진 검은 구멍이 점점 자라 화면을 가득 채우는 것을 본 자와 보지 못한 자
나는 실꾸리가 풀리듯 검은 구멍 속으로 감겨 들어간다. 젖은 습자짓빛에 빨려 메아리도 캄캄하다. 검은 틈 속으로 몸을 숨긴 뒤 흔적 없이 깊어지기만 하는 아가, 아기를 업은 아가, 아기를 부축한 또 아가야, 여기는 울음도 눈물이 되니 않는 지역의 농도, 잠시 빛과 틈새 사이로 번지점프를 하듯
슥, 가로질렀을 뿐인데 이면이 없다. 매일 검은 틈을 키우는 자들은 그림자가 없다. 부풀어 오른 칼자국 사이로 이곳의 빛 무늬와 저곳의 검은 물결을 동시에 본다. 소실점이 없다.
-전문-
해설> 한 문장: 이 작품은 얼마나 '검은 것'들로 가득 차 있는가. 검은 것들은 존재의 모든 "구멍"과 "틈" 사이로 차오르고 부풀어 오르며 존재를 가득 채운다. 그것은 마치 "칼자국"처럼 폭력적이며 위협적이다. 세계는 검은 유령으로 가득 차고 해명 불가능한 것이 된다. 시인은 세계의 파사드(Facade)를 베고 검은 "담즙"을 뿜어 올리는 소리("슥")을 듣는다. 마침내 세계가 온통 검어져 모든 경계와 윤곽조차도 사라질 때, 세계에 근접할 수 있는 선명한 대립각들은 무의미해진다. "소실점이 없다"는 것은 경계와 각도로 접근한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시인은 이런 점에서 대문자 로고스(LOgos)를 해체하며, 혼돈과 비결정의 검은 유령 혹은 검은 덩어리를 외로이 응시하는 자이다. 이 시집은 이항 대립의 구조물 사이에 존재하는 행간의 어둠에 관한 기록이다. (p. 시 34-35/ 론 129) (오민석/ 문학평론가, 단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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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초록을 엄마라고 부를 때』에서/ 2022. 4. 3. <천년의시작> 펴냄
* 안차애/ 1960년 부산 출생, 2002년 《부산일보》신춘문예로 등단, 시집『불꽃나무 한 그루』『치명적 그늘』, 교육도서『시인이 되는 11가지 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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