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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 로벨리『시간은 흐르지 않는다』「관계의 동역학」/이중원 역

검지 정숙자 2022. 4. 26. 16:31

    

    관계의

    동역학

  

    카를로 로벨리(이탈리아, 1956~) : 이중원 옮김

 

  조만간 우리의 시간이 다시 정확히 계산되면

  우리는 아주 힘든 도착지로 항해하는 배 위에 있게 될 것이다.

    2권 9편

 

 

  모든 일은 벌어지지만 시간 변수가 없는 세상을 어떻게 설명할까? 이 세상에는 공통적인 시간도 없고 변화에 특별히 관여하는 방향도 없는 걸까?

  뉴턴이 시간 변수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 모두에게 확신시켜주기 전까지 우리가 세상을 생각했던 방식은 정말 단순했다.

  세상을 설명할 때 시간 변수는 필요치 않다. 세상을 설명할 때 필요한 변수는 우리가 인지하고 관찰하여 결국에는 측정할 수도 있는 양이다. 어느 거리의 길이나 나무의 높이, 이마의 온도, 빵의 무게, 하늘의 색, 밤하늘에 걸린 별의 수, 대나무의 탄성, 기차의 속도, 어깨 위에 올린 손의 압력, 상실의 아픔, 시곗바늘의 위치, 수평선에 걸린 태양의 높이 등·······. 우리는 세상을 설명할 때 이러한 용어들을 사용한다. 하지만 사물의 양과 특성은 계속 '변화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에는 규칙이 있다. 예를 들어 돌은 가벼운 깃털보다 빨리 낙하한다. 달과 태양은 하늘에서 서로의 뒤를 쫓으며 회전하면서 한 달에 한 번 스쳐 지나가고·······. 이러한 양들 가운데 다른 것들과 비교될 정도로 규칙적으로 변화하는 양들이 있다. 날짜 계산, 달의 위상들, 수평선 위의 태양의 높이, 시곗바늘의 위치와 같은 것이다. 이러한 값들을 기준점으로 사용하면 편리하다. 예를 들어 약속을 정할 때, 다음 보름달이 뜬 뒤 사흘 후 태양이 하늘에 가장 높이 떠 있을 때 만나자고 한다거나, 내일 시계가 4시 35분을 가리킬 때 만나자고 할 수 있다. 상당한 변수들이 서로서로 충분히 동기화돼 있다면 '언제'를 표현할 때 이들을 사용하면 편리하다.

  이 모든 변수 중에서 특별한 변수 하나를 선택해 '시간'이라고 부를 필요는 없다. 과학을 하고 싶다면 변수들이 서로가 서로에 대해 어떻게 변화하는지 설명하는 이론이 필요하다. 즉, 다른 것들이 변화할 때 이것이 어떻게 변화하는가를 설명하는 이론 말이다. 세상에 근본 이론은 분명 이러한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시간의 변수는 필요하지 않고 이 세상 속에서 우리가 보고 있는 사물들이 서로에 대해 어떻게 변화하는지만을 설명해주면 된다. 다시 말해, 이러한 변수들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지 설명해 주면 되는 것이다. 69)

  양자중력의 기본 방정식들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공식화가 잘돼 있다. 즉, 시간 변수 없이 변량들 간에 성립하는 가능한 관계들을 나타내면서 세상을 설명한다.70)

  어떤 시간 변수도 없이 양자중력을 설명하는 방정식이 최초로 작성된 것이 1967년이다. 두 미국 물리학자인 브라이스 디윗(Bryce DeWitt, 1923~2004, 81세)과 존 휠러(John Wheeier)가 알아낸 이 방정식을 '휠러   디윗 방정식'이라 부른다.71)

  처음에는 시간 변수가 없는 방정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고, 아마 브라이스와 존도마찬가지였을 것이다.(존 휠러는 "시간에 대한 설명? 존재를 설명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존재에 대한 설명? 시간을 설명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시간과 존재 사이에 감춰진 깊은 관계를 밝히는 일? 미래를 위한 과제다."라고 말했다.)72) 이를 두고 아주 오랫동안 논쟁과 학술 토론회가 펼쳐졌다. 이 내용을 다룬 글에 쏟아부은 잉크로 홍수가 날 지경이었다.73) 이제 티끌이 모여 많은 부분이 아주 확실해진 듯하다. 더 이상 양자중력 기본 방정식에서 시간의 부재에 대한 의문은 전혀 없다. 이는 단지 근본적인 차원에서 특별한 변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의 결과일 뿐이다.

  양자중력 이론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를 설명하지는 않는다. 사물들이 다른 것들과 관련하여 서로 어떻게 변화하는지,74) 세상 사물들이 서로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설명한다. 그것뿐이다.

  브라이스와 존은 몇 해 전에 세상을 떠났다. 나는 두 사람 모두와 안면이 있었고, 두 사람을 깊이 존경하며 찬사를 바친다. 마르세유 대학에 있는 내 연구실 벽에는 존이 보낸 편지가 걸려 있다. 내가 양자중력 분야에서 처음 연구한 내용을 보고 그가 보낸 것이다. 가끔 그 편지를 다시 읽어보면 자부심과 그리움이 뒤섞이곤 한다. 만난 적은 몇 번 없지만 묻고 싶은 게 무척 많았다. 

  내가 마지막으로 존을 만나러 프린스턴에 갔을 때, 나는 그와 오랫동안 산책을 했다. 그의 목소리가 작아서 놓친 말들이 많았는데, 연로한 그에게 자꾸 다시 말해달라고 부탁할 수가 없었다. 이제 그는 이 세상에 없다. 나는 더 이상 질문을 할 수도 없고 내 생각을 이야기할 수도 없다. 그의 생각이 옳은 것 같다고  말할 수도 없고, 그의 생각이 내 평생의 연구를 이끌었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가 양자중력의 미스터리에 가장 먼저 근접한 사람이었다는 내 생각을 말할 수도 없다. 이제 그는 이곳에 더  이상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의 시간이다. 기억과 추억, 부재의 고통, 그것이다. 

  그렇다고 고통을 유발하는 것이 부재는 아니다. 고통은 애정과 사랑에서 시작된다. 애정이 없으면, 사랑이 없으면 부재의 고통도 없을 것이다. 결국 부재의 고통도 삶에 의미를 부여하며 성장하는 것이므로 선하고 아름답다.

  브라이스는 내가 양자중력을 연구하는 단체를 찾아 런던에 갔을 때 처음 만났다. 당시 나는 어렸고, 이탈리아에서는 아무도 연구하지 않던 이 신비로운 학문에 흠뻑 빠져 있었다. 브라이스는 이 분야 최고의 권위자였다. 내가 크리스 아이샴(Chris Isham)을 만나러 임페리얼 칼리지(Imperial College)에 갔을 때 사람들이 그가 꼭대기층 테라스에 있다고 알려주었다. 올라가 보니 작은 탁자에 크리스 아이샴과 카렐 쿠처(Karea Kuchar), 브라이스 디윗이 앉아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몇 해 동안 연구해온 개념들에 정통한 주요 인사 세 명이 모여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서 유리창 너머로 그들을 보았는데 진지하게 토론하는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감히 가까이 다가가 방해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때 내 눈에는 그 위대한 세 명의 선사禪師들이 신비한 미소를 지으며 인간은 헤아릴 수 없는 진실을 나누고 있는 듯 보였다. 그들은 아마 저녁을 먹으러 어디 갈지 이야기하고 있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당시 그들은 지금 내 나이보다 훨씬 더 젊었다. 이런 관점의 이상한 전환도 시간이다. 내 눈에서 이상한 전환장치 같은 것이 작동한 것이다. 브라이스가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에 이탈리아에서 한 긴 인터뷰가 어느 책에 실렸다.75) 그 인터뷰를 보고서야 그가 내 연구를 아주 신중하게 살펴보았고 호감을 가졌음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대화할 때 그는 격려보다는 비평을 더 많이 했기 때문에 예상 밖의 일이었다.

  존과 브라이스는 내게 정신적 아버지였다. 갈증에 시달리던 내가 그들의 아이디어에서 시원하고 맑은, 마시기 딱 좋은 물을 찾았다. 존과 브라이스에게 감사한다. 우리 인간은 감정과 생각으로 산다. 우리는 같은 공간, 같은 시간에 있을 때 대화를 하고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피부를 스치면서 감정과 생각을 교환한다. 이런 만남과 교환의 네트워크를 통해 성장한다. 하지만 사실 이러한 교환을 위해 굳이 같은 공간과 같은 시간에 있을 필요는 없다. 서로를 연결하는 생각과 감정들은 바다를 건너는 것도 어렵지 않고 수십 년의 세월을, 어떤 때는 심지어 수세기를 건너뛸 수도 있다.

  이는 얇은 종이 혹은 컴퓨터의 마이크로칩들 사이의 작용과 연결된 덕분이다. 네트워크는 우리 인생의 며칠과 비교도 안 되게 오래 지속되고, 우리 발걸음이 닿는 몇 제곱미터의 공간보다 훨씬 넓다. 우리가 그 네트워크의 일부분이다. 이 책 역시 그러한 직조물의 한 가닥이고·······.

  얘기가 옆길로 샜는데, 존과 브라이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다. 이번 장에서 하려는 말은 그 두사람이 세상의 동역학을 설명하는 아주 간단한 구조의 방정식을 찾아냈다는 것이다. 이 방정식은 발생 가능한 사건들과 그 사건들 사이의 상관관계를 설명한다. 다른 것은 없다.

  이것이 이 세상에 관한 역학의 기본 형태이며, 여기서 '시간'은 언급할 필요가 없다. 시간 변수가 없는 세상은 복잡한 세상이 아니다. 그것은 상호 연결된 사건들의 그물망이며, 여기에 작용하는 변수들은 우리가 믿기 힘들 정도로 대부분 잘 알고 있는 확률 규칙을 따르고 있다. 산 정상처럼 강한 바람에 날릴 듯하고 아름다움으로 가득 찬 세상, 사춘기 청소년들의 갈라진 입술처럼 아름다운 세상이다. ▩ (p. 124-130)

 

 

  69) 시간 속에서 계(system)의 진화를 설명하는 역학 이론의 일반적인 형식은 위상공간과 해밀턴 함수 H로 이루어진다. 진화는 함수 H에 의해 생성되고 시간 t에 의해 매개 변수화된 궤도로 설명된다. 한편 '서로서로 상호 관련된' 변수들의 진화를 설명하는 역학 이론의 일반적인 형식은 위상공간과 구속조건(constraint) C로 이루어진다. 변수들 간의 관계는 부분 공간(subspace) C=0에서 C에 의해 생성된 궤도들에 의해 부여된다. 이 궤도들의 매개 변수화에는 어떤 물리적 의미도 없다. 자세한 전문적 설명은 C. 로벨리의 『양자중력Quantum Gravity』(Cambridge Univerity Press, Cambridge, 2004)의 3장에 기재돼 있다. 요약된 버전을 보고 싶다면 C. 로벨리의 <시간 잊기Forget Time>(⟪Foundations of Physice⟫ 41, 2011, pp.1475~90, https://arxiv.org/abs/0903.3832)를 를 참조하시라.

  70) 루프양자중력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은 C. 로벨리의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La realta none come ci appare』의 인용문에 기재돼 있다. 

  71) B.S. 디윗(B.S. DeWitt), <양자중력이론. I. 정준이론Quantum Theory of Gravity. I. The Canonical Thepry>, Pyhysical』160, 1967, pp.1113~48.

  72) J. A. 휠러(J. A. Wheeler), <헤르만 베일과 지식의 통합Hermann Weyl and the Unity 0 Knowledge>, 『American Scientist』 74, 1986, pp.366~75.

  73) J. 버터필드(J. Butterfield)와 C. J. 아이샴(C. J. Isham), 『The Arguments of Time』 중 <양자중력에서의 시간의 등장On The Emergence of Time in Quantum Gravity>, J. Butterfield ed, Oxford University Press, Oxford, 1999, pp.111~68(http://philsci-archive.pitt.edu/1914/1/EmergTimeQG=9901024.pdf). H.D. 체(H.D. Zeh0, 『시간 방향의 물리학Die Physick der Zeitrichtung』 인용 『물리학이 플랑크 수준에서 DML 철학을 만나다Physics Meets Philosophy at the Planck Scale』, C. 칼렌더(C. Callender)와 N. 휴거트(H. Huggett) 감수, Cambridge University Press, Cambridge, 2001. S. 캐롤(S. Carroll), 『영원에서 여기까지From Eternity to Here』, Dutton, New York, 2010, 이탈리아어 번역본, 『영원에서 여기까지Dall'eternita' a qui』, Adelphi, Milano, 2011.

  74) 계의 시간에 따른 진화를 설명하는 양자이론의 일반적인 형식은 힐베르트(Hilbert)의 공간과 해밀턴 연산자 H로 이루어진다. 이 진화는 슈뢰딩거의 방정식으로 설명된다. 상태 ψ'를 측정하고 t 시간이 지난 이후에 순수 상태 ψ를 측정할 확률은 전이 진폭<ψ | exp [-iHt/ b] |ψ'>에 의해 주어진다. 서로서로 상호 관련된 변수들의 진화를 설명하는 양자이론의 일반 형식은 힐베르트의 공간과 휠러-디윗의 방정식 Cψ=0로 이루어진다. 상태 ψ를 측정한 이후에 상태 ψ'를 측정할 확률은 다음의 진폭 <ψ | dt enp [-iCtlj] | ψ'>에 의해 결정된다. 자세한 전문적 설명은 C. 로렐리의 『양자중력Quantum Gravity』 인용구를 참조한다. 요약된 버전의 전문 정보는 C. 로벨리의 『시간 잊기Forcet Time』 인용구 참조.

  75) B.S. 디윗, 『광선 위에서Sopra un raggio di luce』, Di Renzo, Roma,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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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를로 로벨리 지음 | 이중원 옮김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2019.6.30.초판1쇄  2020.1.13.28쇄 발행 <쌤앤파커스>

* 카를로 로벨리(1956~, 이탈리아 출생)/ 세계적인 이론 물리학자. 양자이론과 중력이론을 결합한 '루프양자중력'이라는 개념으로 블랙홀을 새롭게 규명한 우주론의 대가로 '제2의 스티븐 호킹'이라 평가받는다. 1981년 볼로냐대학교에서 물리학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고, 1986년 파도바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프랑스 엑스마르세유대학교 이런 물리학 센터 교수이자 프랑스 대학연구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모든 순간의 물리학Sette brevi lezioni di Fisica』『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La realta non e come ci appare』『만약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Et si le temps n'existait pas?』등이 있다. 2014년 이탈리아에서 『모든 순간의 물리학』이 첫 출간된 이후 그의 책들은 종합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영국, 미국, 프랑스, 일본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번역되어 130만 부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한 바 있다. 이는 과학책으로 유례없는 기록이다.

* 이중원/ 서울대학교 물리학과에서 학사 및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동대학원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에서 과학철학으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시립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서울 시립대학교 인문대학 학장 및 교육대학원장, 교육인증원장을 지냈고, 한국과학철학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지은 책으로 『인문학으로 과학 읽기』『서양근대철학의 쟁점』『과학으로 생각한다』『욕망하는 테크놀로지』『양자·정보·생명』등이 있고, 감수한 책으로는『모든 순간의 물리학』『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