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화집에서 읽은 시

원고지/ 박수빈

검지 정숙자 2022. 4. 22. 02:30

 

    원고지

 

    박수빈

 

 

  벼랑 같은 아파트들

 

  언제부터 이 칸을 위해 역병처럼 사는지

  마스크를 쓰고 마신 숨을 다시 뱉는다

  밤이 되면 불 꺼진 口에 눕는 생은 행간 밖

 

  무릎을 꿇다가도 낙타처럼 일어서고 싶은데

  태양 아래 끓어오르던 그 길은 어디로 가고

  삭제된 口들로 채워지는 공백

 

  포클레인 자국이 길을 만들면서부터

  파헤친 흙만큼 산이 생기고

  나의 쓸모는 모래가 바퀴에 들러붙는 듯했다

 

  누군가 타워크레인을 옮겨놓자

  레미콘이 합세하기 시작했다

  시멘트 채운 몸에 눈물을 버무리며

  바람의 설법에 귀를 기울이며

 

  거대한 공사판의 나는 먼지로 사라지고, 살아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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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천지 동인 제9시집『달을 먹은 고양이가 담을 넘은 고양이에게』에서/ 2022. 3. 31. <문학의전당> 펴냄

  * 박수빈/ 광주광역시 출생, 2004년 시집『달콤한 독』으로 작품 활동 시작 & 『열린시학』으로 평론 부문 등단, 시집『청동울음』『비록 구름의 시간』, 평론집『스프링 시학』『다양성의 시』, 연구서『반복과 변주의 시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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