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그만 호두나무 상자
이나명
그날 고양이가 조그만 호두나무 상자로 숨어들어갔어요. 올해로 열여덟 살이었는데요. 한 며칠 허공을 닫는 듯 휘청휘청하더니 밥 대신 물만 조금조금 먹더니 몸을 아주 갑삭하게 만들더니 어둠 속에서 눈만 훤히 뜨고 나를 향해 무어라 무어라 마른 입술을 달싹였는데요. 나는 알아듣지 못하고 그만 잠이 들고 말았어요. 다음날 새벽이 되어서야 보았지요. 애들이 죽으면 무지개다리를 건너간다지요. 그날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 무지개다리가 어딘가 떠 있었나 봐요. 그렇게 가벼워졌으니 새처럼 훌쩍 날아올랐겠지요. 그리고 벌써 넉 달이 지나갔네요. 앞으로도 넉 달이 지나가고 또 넉 달이 지나가고 또 넉 달이 지나가겠지요. 무지개 다리 아래로 위로 여전히 시간은 흐물흐물 흘러가겠지요. 꼭꼭 숨어서 숨소리도 안 들리는 고양이는 저 있는 곳으로 제가 좋아하는 햇볕은 잘 불러들이고 있는지, 그곳으로도 제가 다닐 만한 길을 만들어놓고 겁도 없이 혼자 잘 돌아다니고 있는지, 나는 다만 이곳에서 아무리 불러도 대답 없는 저쪽 세상에 귀를 기울이다가 어쩔 수 없이 고양이와의 모든 기억을 곱게 빻아 담은 조그만 호두나무 상자를 안방에 있는 유리책장 안에 책들과 나란히 넣어두었어요. 나는 또 가끔씩 그 기억들을 꺼내 들고 고양이 이마를 부비듯 내 뺨에 가만히 부벼 보겠지요.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내다 보면 결국, 그러니까 바로 내가 그 조그만 호두나무 상자라는걸 깨닫게 되겠지요. 날이 갈수록 반질반질 닳아서 마침내 흔적 없어질 기억 상자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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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천지 동인 제9시집『달을 먹은 고양이가 담을 넘은 고양이에게』에서/ 2022. 3. 31. <문학의전당> 펴냄
* 이나명/ 1994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금빛 새벽』『중심이 푸르다』『그 나무는 새들을 품고 있다』『왜가리는 왜 몸이 가벼운가』『조그만 호두나무 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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