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리본 고양이 필통/ 박성우

검지 정숙자 2022. 4. 21. 02:15

 

    리본 고양이 필통

 

    박성우

 

 

  나에게는 보라색 헝겊 필통이 있다

  보랏빛 리본을 한 작고 하얀 고양이가

  오른쪽 귀퉁이에 수놓아져 있는 필통,

  4년째 가방에 넣고 다니며 쓰고 있다

 

  이 리본 고양이 필통의 원래 주인은 딸애다

  처음으로 초등학교에 가던 날부터

  4학년을 마치던 해까지 쓰던 특별한 필통,

  그냥 두기에는 아까워서 내가 쓰기 시작했다

 

  보랏빛 리본이 너무 잘 어울리는 거 아니니?
  늘 같은 자리에 붙어있는 하얀 고양이에게

  너스레까지 떠는 날에는 필통이 더욱 좋아졌다

  여전히 나는 연필 쓰는 걸 좋아하는 쪽인데

  연필심이 잘 부러지지도 않아 더욱 애정이 갔다

 

  필통 속에는 늘 필기구가 단출하게 들어있다

  연필 두 자루와 귀퉁이가 둥글게 닳은 지우개,

  0.7 검정 볼펜 한 자루는 예비용이고

  뭔가 잘못되었다 싶은 글을 고칠 때 쓰는

  1.0 파란 볼펜도 빼놓을 수는 없는 귀중품이다

 

  직장에 나가 무심코 필통을 열었을 때였다

  처음 보는 연필이 세 자루나 더 들어있고

  색깔이 다른 형광펜도 둘이나 눈에 띄었다

  네임펜은 뭐고 새 지우개는 또 뭐지?

  필통 안이 여느 때와 달리 풍성해져 있었다

 

  음 그거, 아빠 필통이 너무 빈약해서 그랬어,

  사춘기를 지나는 중2 딸아이에게

  좀 더 나은 여드름약을 사줘야겠다고 생각하면서

  하얀 고양이의 리본을 가만히 만져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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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네르바』 2021-겨울(84)호 <신작시>에서

  * 박성우/ 2000⟪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거미』『웃는 연습』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