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펜 뚜껑 외 1편/ 이현승

검지 정숙자 2022. 4. 18. 03:00

 

    펜 뚜껑 외 1편

 

    이현승

 

 

  가방을 잃어버렸다.

  펜은 없고 펜 뚜껑만 남아서 내버렸는데

  가방에서 펜이 나와 뚜껑을 찾으러 간 사이였다.

  가방에 든 신용카드와 여권과 함께 나는 사라지고 있었다.

  펜 없는 펜 뚜껑처럼, 펜 뚜껑 없는 펜처럼

 

  없어서 더 분명해지는 존재가 있다.

  잃어버린 가방과 집시의 희미한 미소.

  내가 누구인지를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데

  어디에서 왔냐와 무얼 하러 왔냐가

  공연한 의심과 문책이 되는 순간을

 

  증명할 수 있는 것 하나 없이

  필사적으로 내가 되어야 하다니 불공평하다.

  놀러왔는데 테러하러 온 것이 아님을 증명해야 하고

  조그만 아시안은 그만 불친절해지고싶은데

  경직된 미소는 난처한 의심만 만들어낸다.

 

  뚜껑만 남은 펜처럼 없어서 있는,

  테러리스트가 아니어서 투어리스트가 되어야 하는

  나는 펜을 줄 테니 가방을 달라고  말하기 위해서

  테러범 같은 집시를 만나야 하고

  여행은 반드시 자기를 찾아 떠나는 여행일 수밖에 없고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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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일 소원

     -생일을 맞은 이태민으로부터

 

 

  모든 생일은 엄마가 가장 아프고 가장 기뻤던 날이에요.

  생일에 미역국을 먹는 건

  그날 아픈 엄마가 후루룩 넘겼던 미역국을 먹는 거지요.

 

  저는 요리사가 되는 게 꿈입니다.

  저는 엄마가 너무 좋아서 엄마가 되고 싶었어요.

  저는 남자니까 아이를 낳을 수는 없지만

  누군가가 먹고 행복해지고 특별해지는 음식을 만들고 싶어요.

  스위치를 올리면 환하게 불이 켜지듯,

  제가 만든 달콤한 케이크를 먹고 엄마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생각을 해봅니다.

 

  소원을 빌 때,

  하나만 빌어야 하니까 건강을 비는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은 함께하고 싶은 게 너무 많지만

  그걸 다 하루아침에 할 수가 없어서 가족이 되는 거지요.

  서로 좋아서 마주보고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표정을 짓다보면 닮아지는 거예요.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닮는 거 알죠?

  사람을 닮게 하는 요리를 하고 싶어요.

 

  우리는 만나면 안녕? 하고 묻고

  헤어질 땐 안녕, 하고 말해요.

  질문이고 대답이고 부탁인 말이 안녕이에요.

  엄마가 제 소원을 묻는다면 저는 부탁하고 싶어요.

  안녕해주세요. 안녕이라고 말하고

  우리는 안녕이 되고 싶어요.

 

  오늘은 저의 열아홉 번째 생일입니다.

  맨날 그날이 그날인 날에는 특별한 것이 먹고 싶었는데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평범한 미역국이 먹고 싶어요.

  제 생일에 미역국을 먹고 같이 생일이 되어주세요.

  가족이 되어주세요.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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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대답이고 부탁인 말』에서/ 1판 1쇄 2021. 9. 20    1판 2쇄 2021. 10. 8. <문학동네> 펴냄   

  * 이현승/ 1973년 전남 광양 출생, 2002년『문예중앙』으로 등단, 시집『아이스크림과 늑대』『친애하는 사물들』『생활이라는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