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주인으로 바쁜 비/ 노수옥

검지 정숙자 2022. 4. 14. 01:43

 

    주인으로 바쁜 비

 

    노수옥

 

 

  재개발 지구 빈집 마당

  버려진 화분이 미아처럼 시들합니다

  주인 없는 화분에

  주인인 양 비가 내립니다

  텃밭의 보모 같았던 여름비가

  어느새 화분의 주인을 자처합니다

 

  가끔 와서 밥 챙겨주듯

  내리는 비는 주인으로 바쁩니다

 

  화초도 아끼는 사람이 없으면

  한낱 풀의 종류가 됩니다

  그건 비의 가족이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화분의 마지막 주인은 귀먹은 노인이었습니다

  그때 화분은 주름의 동향만 살피고도

  비를 예견하는 관절의 일기예보 법을

  노인에게 차근차근 배웠습니다

 

  시들한 푸념 한 마디가 욱신거리면

  메마른 화분에도 비가 내립니다

 

  가끔 두리번거리는 행인이 있어

  종종 사라지는 값비싼 화분도 있지만

  화분 밑에 열쇠를 숨기던 천리향화분은

  발이 묶여 허전합니다

  주인 없는 빈집

  혼자 바쁜 빗소리와 노인의 소문이

  함께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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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래시학』 2022-봄(40)호 <미래시학 시단> 에서

   * 노수옥/ 충남 공주 출생, 2015년 『시인정신』으로 등단, 시집『사과의 생각『기억에도 이끼가 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