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시집 · 열매보다 강한 잎

서평/ 새로움의 인식과 표현 - 정재영

검지 정숙자 2011. 10. 12. 17:19

 

 

평|론| 정숙자의 『열매보다 강한 잎』을 중심으로

 

   새로움의 인식과 표현

 

      정재영 시인

 

 

   1. 들어가는 말

   역사적으로 시를 대할 때 내용보다는 먼저 형태학이고 기술적(descriptive)인 면인 기법을 우선해서 보는 견해를 강조하는 것은 형식주의 시인들과 비평가들이다.

   크리들(Kridl)은 “문학 연구의 대상은 그 자체이지 다른 외부적인 연구를 위한 수단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문학에서 심리학이나 사회학 또는 문학사와 같은 인접 학문으로부터 문학을 분리하기 위해서였다.

   야콥슨이 말한 ‘작품이 문학성을 가지게끔 하는 요소’나 ‘무엇이 문학의 특징’인가 하는 것은 바로 형식에 대한 관심을 두고 일컫는 말이다.

   그들은 시를 분석하거나 비평할 때 심리적인 요소인 영감(intuition)이 나 상상력(imaginaion), 시인의 천재성(genius) 등에 관한 정신적인 기능(faculty of mind)을 배제하려고 했다. 그들은 문학과 비문학의 차이점을 말하면서 작품이란 시인이 다루는 현실영역이 아니라 표현 양식(mode of presentation)에서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형식주의자들은 s시의 중요성은 이미지나 감정이 아닌 언어라는 것이다.

   슈클로부스키도 <기법으로부터 예술>에서 말하기를 시는 이미저리의 유무가 아닌 용법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시의 이미지와 산문화하기 위해서 설명을 위한 이미지보다는 의도적으로 낯설게 만들기(makes strange)를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대상을 새롭게 파악하여 새롭게 드러내는 새로운 인식의 영역임을 말하는 것이다.

   이 새롭게 인식하는 것은 규범으로부터 일탈(deviation)하는 양태를 핵심에 두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대상을 뒤틀리게(twisted)하고, 에둘리는(oblique) 담론 양식을 취한다. 이 양식을 취하는 것은 겉으로는 소통을 방해하고 독자로 하여금 더 강렬하게 새로운 인식의 세계와 손을 잡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동기술법(automatization)처럼 이해가 다가오지 않는 난해성과 지각 가능성(perceptibility)을 구분하기에 후대 마르크스주의자들에 비판을 받게 된다. 문학의 형식은 곧 문학성의 정의와 함께 시의 새로운 옹호를 위해 자체적이며 내적으로 필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상을 새롭게 인식한다는 것은 형식주의자들이 구체적으로 밝혔을 뿐이지 실은 역사적으로 이미 오래 전부터 이용한 방법론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비일상의 언어(unusual word)라는 말이나 낭만주의 미학자들인 코울리지나 워즈워드 등이 새로움과 신선함의 감각(the sense of novelty and freshness)을 통한 놀라움의 감각(sense of wonder)응ㄹ 추구한 것은 오랜 기간에 시인들이나 미학자들이 말했던 시에 대한 태도였다.

   이런 면에서 시집 『열매보다 강한 잎』을 중심으로 정숙자 시인의 작품을 분석해 보고자 한다.

 

 

   2. 정숙자 시인의 창작 방법론

 

   우선 표제시를 들어본다.

 

 

       마지막엔 이것뿐이다

       꽃 아니다 기둥 아니다 수많은 잎새도 아닌 다만 두 잎뿐이다

       두 잎이면 다시 하늘을 열고 별을 기르고 마파람 부를 수 있다

       껍질 속 두 잎은 우뇌/좌뇌란다

       좌청룡 우백호란다

       씨앗들은 스스로가 명당이요 명문이란다

       흔들림 없는 두 잎을 열고 나무는 걸어나간다

       큰길 소롯길 모두 제 안에 있다

       만 리를 내다보는 키가 되어도 어느 한 잎 잎차례 변치 않는다

       잎들은 알을 품는다

       알보다 먼저 달리고 알보다 늦게 익는다

       첫 잎이자 마지막 두 잎

       간절히 합장한 두 잎

       두 잎을 밀봉한 다음이라야 잎잎 붉은 잎 몸을 날린다

       가슴 한복판으로 툼벙툼벙 떨어진 날들

       밀리고 밀린 나이테 파문! 나무 속에 호수가 있다

       잎새에선 노상 잔물결 소리가 난다

       두 잎이면 모든 잎이다

       두 잎이 남아 있는 한 어떤 내일도 초록빛이다                                                                            

         -「열매보다 강한 잎」전문

 

   이 작품에서 잎이란 뇌를 말한다. 열매는 햇빛을 받아 작용한 잎의 역할로 생기는 결과불이다. 잎이란 뇌 사고의 기능을 말하는 것이며, 열매는 사고에 의한 드러남인 행동을 지시하는 말이다. 즉 행동은 사고의 결과이다. 그러하기에 행동은 사고에 의한 종속물이다. 물론 행동이 사고를 지배한다는 행동심리학이 있지만 여기서 화자가 말하는 것은 인간이 가지는 사유의 가치와 상상의 범위와 그 결과 만들어지는 창조적 능력을 인식하고자 함이다.

   인간이라는 나무가 가지는 두 잎의 모습을 1~2행에서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4행에서 직설적으로 뇌를 형태학적으로 두 잎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두 잎은 인간의 뇌다.

   3행에서 이 뇌는 ‘하늘을 열고, 별을 기르고 마파람 부를 수’ 있는 그 기능을 진술하고 있다. ‘하늘을 연다’는 의미는 무한한 우주의 영역까지 사고할 수 있다함이며, 동시에 창조와 창조주에 대한 신비를 인식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별을 기른다’함은 인간이 가지는 꿈과 이상을 말하는 것이다. ‘마파람을 부를 수 있다’는 것은 우주적 인식의 감각적인 체험의 가능성을 일컫는 것이다.

   5행에서 두 잎은 음택인 묘지나 주거인 양택의 명당자리의 구성요소를 말함으로 두 잎 사이에 자리한 중요한 위치가 또 존재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연하 부근이나 뇌하수체 등의 중추를 이루고 있는 뇌의 장소를 말함이다.

   6행에서는 인간의 행동이 이 두 잎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나무로 표현하여 인간의 행동을 보여주고 있다. 나무란 고정성인데 여기서 나무가 걸어간다는 말은 육체란 나무처럼 의존적 존재임을 은연중에 내포하고 있다. 잎은 흔들림이 없고 나무는 보편적인 나무와 달리 움직이는 기이한 모습에서 나무의 낯선 모습을 메타포해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보편적 관념이 아닌, 낯설게 만들기의 하나의 형태다.

   움직이는 나무를 보여줌으로 두 잎에 의하여 고정성을 이동성으로 변용하는 태도는 시인의 창조적 연상에서만 가능하다. 이것은 현대시의 의도된 기획물이라는 용어에 합일하는 창작 기법이다. 이처럼 논리를 벗어난 새로운 논리, 비논리로 진리를 추구하는 방법이 시가 가지는 특성이다.

   시가 말하는 진리는 언어의 면에서는 거짓 진술(pesudo-statement)이다. 그러나 거짓의 진술인 시의 가상 세계나 상상 세계는 시적인 진실(poetictruth)인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야 정서나 관념이 감각적으로 잘 드러나게 된다.

   8행의 ‘큰길 소롯길’은 인간의 사고에 의하여 지배받는 영역을 일컫는다. 곧 나무 주위의 모든 영역과 범주를 말하는 그것은 인간이 사고하는 모든 영역에 미치는 가능성과 영향력을 말하는 것으로 두 잎으로 부리는 뇌 속에서 추축하는 모든 사유가 미치는 무한한 영역을 지시하고 있다.

   9행은 사유의 범위가 아무리 높아져도 사고하는 뇌의 불변성을 말하고 있다.

   10행의 ‘알들’이란 각종 뇌가 생산해내는 기능성 모습을 말하는 것으로 11행에서 두 잎의 순간적이고 찰나적인 뇌의 기능을 보여주려 함이다.

   11~13행은 10행에서 말하는 뇌의 우수한 기능을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다.

   14행에서 ‘나이테’란 인간의 뇌 속에 축적된 인간의 무의식 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15행의 ‘잔물결’은 의식이 물결처럼 잠재하고 있는 의식체계를 말하고 있다. 나무보다 더 넓은 무의식을 호수로 빗대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행의 ‘초록빛’이란 인간이 가능성에 대한 감각적 언어를 들어 이미지를 동원하고 있는 형상미학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마지막 두 행은 인간이란 두 잎과 같은 뇌에 의하여 존재론적으로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화자는 변용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 살핀 것은 주관적인 인상비평(감상비평)에 지나지 않는다. 이 인상비평이란 객관성을 가지지 못한다. 수용체인 독자의 형편에 따라 각각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을 창작기법을 중심으로 한 이론인 작품을 작품으로 이해하려는 형식주의 비평에 의탁한다면 작품의 해석에서 객관성을 가지게 된다.

   인간의 무한한 자율성이라는 원관념을 뇌의 작용과 연결하는 일차적인 연상에서 나무와 이파리로 제3차적인 연상이라는 창조적인 연상을 통해 새로운 모습으로 바꾸어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또한 비틀어 쓰기로, 현대시가 추구하는 주류를 이루고 있는 창작론이다. 이런 면에서 정숙자 시인의 시가 형식주의 면에서도 현대시의 중심적인 창작기법에 타당한 토대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한다. 

   다른 작품을 찾아 정 시인이 가진 창작 방법의 모습을 찾아보자.

 

 

       길과 하늘

       아침을 잃어버린다

 

       절벽을

       강을

       들을

       건너는

       예기치 않은 침묵은

       천문대가 모르는 또 하나

       태풍의 시작

 

       삶이라는 말보다도

       더 붉고

       섧고

       가파른

 

       사랑은 사랑 말고는

       다른 어둠을 알지 못한다

         -「바람의 빛」전문

 

 

   인간 의식의 양태를 바람으로 그려주고 있는 작품이다.

   첫 연의 ‘길과 하늘 아침’은 의식의 통로나 방향이나 시간적인 요소를 한 덩어리로 응축시켜 말하고 있다. 엘리엇이 말한 공간과 시간을 동시에 말함으로 이미지의 통합적 감수성을 시도하고 있다. 공기의 흐름인 바람이 눈에는 보이지는 않더라도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으로 치환해 내는 것을 보여준다.

   2연에서 이 바람이 단순한 공기의 흐름이 아닌 예측 못하는 심리상태를 말하고 있다. 침묵에서 시작하는 태풍처럼 인간의 작은 의식이 곧 인식의 세계에 영향을 주고 있음을 말한다.

   3연의 삶을 ‘붉고 섧고 가파르다’함은 관념의 육화를 통한 형상화 작업이다. 시각을 통한 감각인 색과 형태에서 의식의 짜깁기(혼합)를 하는 언어를 진열하고 있다.

   바람은 빛을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제목에서 말하는 ‘바람의 빛’이란 ‘사랑과 다른 어둠’이라는 양극화 된 반어에서 해석의 단초를 제공받는다. 사랑이 정서적으로 가지는 빛인 것이다. 화자의 마음 안에서 태풍처럼 부는 사랑의 색깔을 이미지화함으로 언제 어디서나 쉬지 않고 움직이는 사랑의 특성을 시각적인 형상으로 보여줌으로 이끌어내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도 형식주의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논했던 비논리성의 논리화가 생기는 것을 통해 감동을 받게 된다.

   2연의 ‘천문대’란 과학적 논리를 말하는 것이다. 천문대는 우주의 모습을 통찰하는 과학시설이다. 천문대라는 언어가 가지는 기표에서 다양한 기의를 도출하는 것에서 소쉬르의 이론습을 보게 된다.

   이성과 과학적인 태도로 설명이 되지 않는 다양한 인간 잠재의식을 바람이라는 양태를 통해 보여주려 하는 것이다. 원관념은 사랑을 동반한 인간의 의식과 잠재의식을 말하는 것으로 보조관념은 천문대도 밝혀주지 못하는 바람의 진로와 모습인 것이다. 이것은 사랑만이 의식의 결과와 의미를 해석할 수 있고, 사랑만이 의미를 줄 수 있다는 것을 작품 안에 깊이 은폐시켜 두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절대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시인의 의식 세계를 메타포를 통해 변용하려고 할 뿐이다. 이것은 대상을 양극화(상반성) 시키는 작업의 일종이다.

   초두에 말하는 길이란 그의 「길에 대한 리서치」시에서 극명하게 규명할 수 있다.

 

 

       정다운 오솔길, 얼었다 풀린 진흙길, 예기치 않은 빙판길, 돌아나온 골목길, 땡볕 깔린 자갈길, 툭 터진 바람길, 별 쏟은 난바닷길, 앞뒤    모를 굽이길, 구름 고운 뒤안길, 하늘만 믿는 비탈길… 자! 당신은 타인에게 어떤 길인가?

 

 

   여기서 다양한 모습의 길들을 제시하고 있다. 행복한 상태와 다정한 관계를 ‘정다운 오솔길’로 보여준다든지 고난과 순탄이 혼조된 삶을 ‘얼었다 풀린 진흙길’로, 예기치 못한 사고를 겪는 모습을 ‘빙판길’로 말한다든지, 감당하기 힘든 고통의 사람을 ‘땡볕 까릴 자갈길’로 말한다든지, 인간의 능력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환난의 삶을 ‘하늘만 믿는 비탈길’로 표현하는 것은 관념을 객관화(시각화) 시키고 있는 창작론에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부분은 읽는 사람도 다른 사람에게는 그런 길의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자기성찰을 하게 하는 의미를 담은 작품이다. 즉 타자와 자아와의 연결을 통한 교시적인 기능을 가진 시다.

   여기서 이 시의 내용을 말하고자 함은 아니다. 앞의 예시 「바람의 빛」에서 ‘바람의 길’은 곧 ‘인간의 길’이라는 것을 숨겨두었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함이다.

   그의 많은 작품들 속에 동원된 이미지는 정지된 모습이 아니라 이동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1초 혹은 2초 사이로 지나가는 태풍」「그러므로 강물도」「물별」「산은 넘는 자의 것이다」「떠돌이별」「여름이 떠나는 아침」등은 말할 것도 없고 의식의 세계가 비탈길에 선 상황을 말하고 있음을 그의 작품 안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이런 시어의 사용은 시인의 경험에 축적된 산물인 상상의 언어에 의하여 규명되는 것이다. 시어의 사물은 이름이 아니라 어떤 관념이 그 이름에 의탁하여 발생하는 것임을 소쉬르가 말한 바와 같다. 그의 이동성의 언어는 정착하지 못한 시인의 의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를 통한 진리추구의 과정이 여전히 진행 중에 있음을 알게 한다.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오브제는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이고 타당성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타자와의 언어적 교류는 이해 가능한 진술의 주고받기가 아니라 말의 주고받는 행위 자체다. 왜냐면 언어 자체에 가치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레비스트로스에 의하면 이런 메시지의 교환은 인간이 되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다. 인간의 공생을 위한 사랑을 나누는 것과 같은, 이해가 아닌 증여와 수용에서 그 목적을 달성한다고 한다. 이런 면에서 앞의 예시는 좋은 본보기가 된다. 인생의 의미를 새롭게 파악하고 해석하는 형이상학적 담론인 작품이다.

   다른 시 한 편을 살펴보자.

 

 

       가다가 길이 막히면 거기서부터가 산이다

       산을 넘지 못하면 그 너머 길을 잇지 못한다

       평지에 허리를 감춘 산은 압구정동 네거리 거실 의자 중환자실 침대 위에도 있다

       산을 허무는 일이야 산을 일으킨 바람에게 물어야 한다

       우리 모두는 혼자다

       갈수록 비탈일 수밖에 없다

       많은 이가 한 길을 함께 걸어도 그 길은 제가끔 다른 길이다

       관점이 길을 바꾼다

       지상에 난 모든 길은 관점으로 가는 길이다

       산을 오래 타다보면 사람도 산이 되는지 얼굴 어딘가 폭포가 숨고 이끼가 끼고 나비가 되지 않는 벌레도 안고 키운다

       전생을 건너온 발이 여기 발아된 그 순간부터 산이 매복하고 있었던 게다

       많기도 하지

       어디든 눈을 던지면 산이 산을 업고 또 기대고 있다

       어둠이 다락같은 저 붉은 산들을 누가 다 넘어 갔을까

          -「산은 넘는 자의 것이다」전문

 

 

   역시 이 작품도 형이상학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는 철학적인 담론이다. 예시는 첫 행부터 ‘길’이라는 수평적 구조와 ‘산’이라는 수직적 구조를 가진 이미지를 드러내고 있다. ‘길’과 ‘산’이라는 대상을 제시하고 있음에서 서로 양극화된 이미지를 동원하고 있다. 길의 끝이 산이라는 말에서 산이 가지는 의미망을 알게 된다. 그것은 삶의 막힘이다.

   2행에서 ‘산’이란 ‘길’을 끊어버리는 요소다. 이 산의 이미지에 은폐시킨 것은 3행에서 ‘압구정동’이라는 고급주택이 있는 장소마저 ‘중환자실’이라는 표현을 통해 존재론적 담론을 보여주고 있다.

   4행에서 산의 특성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산은 저절로 생긴 자연이 아니라 바람이 만들었다는 말에서 다시 앞의 예시처럼 바람이 상징하는 환난이나 인생에서 예기치 않은 힘든 과정을 제시하려고 하는 것을 엿볼 수 있다.

   5행에서는 인간의 실존적 존재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6행에서는 이 산 앞에서 인간은 항상 고독의 실존의식을 가진다. 인간의 희망이 구속된 비탈에 선 실존이다.

   7행은 그 실존이 군중 속의 단독자로 있음을 말하는데 그 이유는 다음 행에서 관점이 다르기 때문임을 지적한다. 8~9행은 이 관점이란 길의 목표를 지향하는 방향을 말하고 있음을 진술하고 있다.

   10행에서 ‘산을 오래 탄다’고 함은 방황하는 인간의 한 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 고난의 기로에 선 사람의 체질화 된 모습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폭포’나 ‘이끼’나 ‘나비’는 산속이라는 현장에서 체험하는 단독자가 가지는 실존 모습을 더욱 현장감 있게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화자는 ‘전생’이라는 언어를 사용함에서 역사적 의식이 윤회적인 종말론을 가지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시작과 끝이 존재하지 않는 원을 도는 역사관은 산은 곧 평지의 길을 제시한다는 것을 은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산이란 바람이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그것 자체가 자존적으로 존재하는 이중적인 진술에서 산의 의미를 노출시키는 것이 바람의 역할이다. 바람은 환경적 요소요 변화를 가지는 대상의 성질을 말하려 하는 것이다. 반대로 산은 근본적이고 본태적(essential) 실존 양태이다. 이 이미지도 상반된 위치에서 다양성을 가지고 있음을 눈치 채게 한다.

   마지막 행의 ‘붉은 산’은 노을에 젖은 인생의 종말에 처한 실존적 위치를 보여주는 모습이다. 이 산을 넘는 것은 누구나 겪어야 하는 통과의례라는 운명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대상을 제시하는 사물들은 상징성을 내포하면서 대상의 의미를 은폐시키고 있다.

   이처럼 새로운 인식을 사물로 치환하여 의미를 전달하는 시적 방법론은 현대시의 기본적인 토대이기에 이 작품이 수사학적으로 탄탄한 이론의 바탕을 가졌다 하겠다.

 

 

   3.나가는 말 

   시란 대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통한 새로운 해석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 새로움이 곧 창조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형식주의자들이 말하는 새로움에서 과학적인 전달 수단인 일반 언어와 달리 시어는 비논리적이라는 것이다. 야콥슨이 인식적인 담화보다는 정서적인 형태에 시적 발화를 두었던 것도 산문과 시의 다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시어의 기호학적인 면에서 애매성(모호성 ambiguity)이 생기는 것도 시어가 가지는 특수성에 기인한다. 이 애매성이라는 면에서 시어는 시각적인 확실성보다는 다양한 정감을 전달한다. 이미지의 확실하고 구체적인 시각화보다는 상상의 표피를 객관화시키지 못하는 것을 통해 의사전달의 극대화를 꾀하기 위함이다. 형식주의자들이 언어의 시각화가 그림의 기능보다 더 열등함을 강조한 것도 그 연유에서다.

   그들은 시인이란 표현이 아니라 언어의 조종(maniqulation)이라고 정의를 내렸다. ‘기법으로의 예술’이라는 말이 뜻하는 바처럼 시적 형식의 문학성을 주요시했던 것이다. 이런 기법을 중요시하므로 시란 항상 만들어지는 기술(technique 또는 artful)이어서 인위적(의도적)인 기획물을 현대시의 특성이라는 점을 강조하게 된다. 인위적이라는 말은 대상을 의도적으로 새롭게 인식하고 새롭게 해석하는 시인이 가지는 미학적 기술의 운용 방법을 말한다.

   이런 형식주의 입장에서 볼 때 정숙자 시인의 시집 <열매보다 강한 잎>은 이론적으로 탄탄한 토대 위에서 창작한 열매라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래서 그의 시편들마다 이론과 실제가 미학적인 자기 위치를 지키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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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소리문학』2011-가을호  

    * 정재영/ 치학박사.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을 졸업. 시집『땅에 뜬 달』『옹이 속의 나무테』『濃霧』『유리숲을 걷다』『꿈꾸는 물의 날』『어둔 밤에야 너의 소리를 듣는다』『벽과 꽃』, 『모퉁이 돌면』. 시집 외 저서 『현대시의 시법과 창작실제』『문학으로 보는 성경』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