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시집 · 열매보다 강한 잎

서푼짜리 친구로 곁에 있어줄게/ 장석주의 시와 시인을 찾아서

검지 정숙자 2012. 5. 29. 01:28

 

 

    서푼짜리 친구로 곁에 있어줄게

 

      정숙자 <무인도> 

 

   장석주 시인. 문학평론가 |사진 김선아  

 

 

  서푼짜리 친구로 있어줄게

  서푼짜리 한 친구로서 언제라도 찾을 수 있는

  거리에 서 있어줄게

  동글동글 수너리진 잎새 사이로

  가끔은 삐친 꽃도 보여줄게

  유리창 밖 후박나무

  그 투박한 층층 그늘에

  까치 소리도 양떼구름도 가시 돋친 풋별들도

  바구니껏 멍석껏 널어 놓을게

  눈보라 사나운 날도

  넉 섬 닷 섬 햇살 긴 웃음

  껄껄거리며 서 있어줄게

  지금 이 시간이 내 생애에 가장 젊은 날

  아껴아껴 살아도 금세 타 내릴

  우리는 가녀린 촛불

  서푼짜리 한 친구로

  멀리 혹은 가까이서 나부껴줄게

  산이라도 뿌리 깊은 산

  태평양이 밀려와도 끄떡없는 산

  맑고 따뜻하고 때로는 외로움 많은

  너에게 무인도로 서 있어줄게 

    -정숙자, '무인도' 전문- 

 

  <무인도>는 '너'라는 이인칭으로 불러낸 대상에게 변치 않을 우정을 약속하는 시다. "서푼짜리 친구"로 "언제라도 찾을 수 있는 거리"에 서 있겠다고, 좋을 때나 나쁠 때나 넉넉한 웃음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한다. 이 우정의 약조는 갸륵하다. 매화처럼 사람을 고상하게 하고, 난초처럼 사람을 그윽하게 하고, 국화처럼 사람을 소박하게 하고, 연꽃처럼 사람을 담백하게 하는 이가 벗이다. 저 혼자서는 아무것도 아니되 벗과 더불어 있을 때 매화가 되고 난초가 되고 국화가 되고 연꽃이 된다. 이렇듯 참다운 벗은 나로 하여금 매화와 난초와 국화와 연꽃의 격을 갖게 만든다. 금란지계(金蘭之契)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둘이 마음을 합치면 쇠도 자를 수 있을 만큼 단단해지고, 그 향기가 난의 향기와 같다는 뜻이다.

  조선시대 선비 이덕무에 따르면 친구란 먼저 나지도 않고 뒤에 나지도 않으며 한 시대에 함께 태어나야 하며, 남쪽 땅에 나지도 않고 북쪽 땅에 나지도 않고 한 고장에 함께 태어나는 공요롭고도 오묘한 인연이 닿아야만 한다고 말한다. 시인의 친구는 "맑고 따뜻하고 때로는 외로움"이 많다고 했다. 시의 화자는 그 친구를 위해 삐친 꽃, 까치 소리, 양떼구름, 풋별들을 보여주겠다고 약속한다. 그가 홀로 외로울까 봐, 그가 홀로 심심할까 봐.

  시인은 자신을 가리켜 "서푼짜리" 친구라고 말한다. 생이란 그것이 품은 졸렬과 수치 때문에 "서푼짜리"만큼이나 가볍고 하찮은 것이다. 시인은 "아껴아껴 살아도 금세 타 내릴/우리는 가녀린 촛불"이라고 한다. 그 우정의 무게는 대단하다. 그 우정은 "산이라도 뿌리 깊은 산/태평양이 밀려와도 끄떡없는 산"과 같은 우정이다. 시인이 "너에게 무인도로 서 있어줄게"라고, 변치않을 우정을 약속한 친구는 누구인가? 물론 그 대상은 사람일 수도 있겠지만, 그건 시가 아닐까라고 짐작해본다. 시가 무엇이길래 그토록 깊은 우정을 다짐하는 것일까. 김소월이 "날마다 풀을 따서 물에 던지고/흘러가는 잎이나 맘해 보아요."(<풀 따기>라고 노래할 때, 그 뜻 없는 해작질 같은 게 시가 아닐까. 시는 날마다 풀을 따서 물에 던지고 물결 따라 흘러가는 잎에나 마음을 주는 일이다. "쓸쓸해서 머나먼"(최승자) 것, 한 세기 전에 한 시인이 반쯤 벌어진 석류를 보고 "제가 발견한 것들의 힘에 겨워 파열된 고매한 이마"(폴 발레리)라고 할 때 그 언어의 섬광들, 우연의 기적들, 그래봤자 언어의 묶음인 것, 그것이 시다. 그 벗을 위하여 시인은 무인도로 서 있겠다고 말한다. 무인도는 말 그대로 사람이 살지 않는 섬이다. 시에게 살과 뼈와 오장육부를 다 바쳤으니, 시인은 가진 게 없겠다. 무인도나 다름없이 고적하겠다. 그러니까 이 구절은 시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치고 무인도의 고적한 운명을 받아들이겠다는 다짐이다.

  시인은 "갈비뼈 하나 바치지 않고 자신의 창세기 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피 묻히지 않고 갈비뼈 하나 주무를 수 있는 사람도 없다"(이브 만들기)고 했다. 그가 제 갈비뼈를 바쳐서 열 창세기란 무엇인가? 바로 시인의 삶이다. 그가 죽은 뒤에는 봉분(封墳)도 필요 없다고 했다. 육신은 썩어 흙과 바람과 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뼈로써 쓴 시는 남는다. "가지런히 썩은 <시>자(字)를 이슬이 먹고 새들이 먹고 구름이 먹고 바람이 먹고…/자꾸자꾸 먹고 먹어서 천지에 노래가 가득하도록…/독을 숨기고 웃었던 시는 내 삶을 송두리째 삼키었지만 나는 막대기 둘만 있으면 한 개 부러뜨려 <시>자(字)를 쓴다/젓가락 둘 숟가락 하나 밥상머리에서도 <시>자(字)를 쓴다"<무료한 날의 몽상·무위집(無爲集) 2>). 시인의 운명 외에는 아무것도 욕심이 없는 사람! 그랬으니 젓가락 둘과 숟가락 하나가 놓인 밥상머리에서도 그 젓가락과 숟가락으로 <시>자를 쓸 사람이다.

  시인에게 시는 처음 마주쳤던 그 순간부터 흠모의 대상이고, 꿈과 운명을 빨아들이는 스펀지와 같은 그 무엇이었다. <무인도>을 읽으며 다시 한 번 시에 자신을 송두리째 바친 시인의 마음을 짚어본다. 시가 마음을 송두리째 가져가 버렸으니, 자나깨나 시 생각밖에 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그는 상상에서조차 사람의 뼈를 추려내면 몇 편의 <시>자(字)를 쓸 수 있을까, 하는 사람이다. "막대기가 셋이면 <시>자(字)를 쓴다/ 내 뼈마디 모두 추리면 몇 개의 <시>자(字) 쓸 수 있을까"(무료한 날의 몽상˙무위집(無爲集) 2>. 사람의 뼈는 206개다. <시>자를 쓰려면 뼈 세 개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사람의 뼈를 오롯이 추려 쓸 수 있는 시는 69편이 채 안된다. 시인은 무료한 날의 몽상 끝에 이런 구절을 적고 있다. "동그란 해골 하나는 맨 끝에 마침표 놓고 다시 흙으로 덮어다오". 제 뼈를 다 추려 시를 쓰고 해골을 마지막 시의 마침표로 쓰겠다는 이 서원(誓願)에는 과연 시에 종신재직을 맹세할 만한 결기가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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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OP class』2012. 6월호 <장석주의 시와 시인을 찾아서> 전문 

 * 장석주/ 충남 논산 출생, 1975년『월간문학』으로 등단,1979년 《조선일보》《동아일보신춘문예 시 당선, 문학평론 입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