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시집 · 열매보다 강한 잎

작품론/ 정숙자의 「내 오십의 부록」에 대하여 - 반경환

검지 정숙자 2010. 10. 30. 01:00

     

    정숙자의 「내 오십의 부록」에 대하여

     - 반경환의 명시감상 7

 

      반경환/ 문학평론가



   편지는 내 징검다리 첫 돌이었다

   어릴 적엔 동네 할머니들 대필로 편지를 썼고

   고향 떠난 뒤로는 아버님께 용돈 부쳐드리며 “제 걱정은 마세요” 편지를 썼다

   매일 밤 내 동생 인자에게 편지를 썼고

   두례에게도 편지를 썼다

   시인이 되고부터는 책 보내온 문인들에게 편지를 썼고

   마음 한구석 다쳤을 때는 구름에게 바람에게 편지를 썼다

   돌아가신 어머니 그리울 때는 저승으로 편지를 썼고

   조용한 산책로에선 풀잎에게 벌레에게 공기에게도 편지를 썼다

   셀 수 없이 많은 편지를 쓰며 나는 오늘까지 건너왔노라

   희망이 꺾일 때마다 하느님께 편지를 썼고

   춥고 외로울 때는 언젠가 묻어준 고양이 무덤 앞에서 우울을 누르며 편지를 썼다

   어찌어찌 발표된 몇 줄 시조차도 한 눈금만 들여다보면 모습을 바꾼 편지에 다름 아니다

   편지는 내 초라한 삶을 세상으로 이어준 외나무다리, 혹은

   맑고 따뜻한 돌다리였다

   편지가 있어 내 하루하루는 식지 않았다

   한 가닥 화려함 잃지 않았다

   편지봉투 만들고, 편지지 접고, 우표를 붙일 때마다

   시간과 나는 서로를 사랑하고 용서하고 또 믿었다

   그리고 그 조그만 빛이 다음 번 징검돌이 되고는 했다


   -「내 오십의 부록」(『열매보다 강한 잎』, 천년의 시작, 2006년) 전문


   편지는 우리 인간들이 상호간에 소식을 주고받는 양식이다. 문자가 없었던 시절에는 대리인을 통하여 그 소식(말)들을 주고받았겠지만, 그러나 문자가 등장하고부터는 편지를 통해서 발신인의 마음과 뜻을 전달하고, 수신자는 그 발신자에게 또다시 편지를 통해서 그의 마음과 뜻을 전달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편지의 주고받음의 관계는 급기야는 우편사업을 통하여 국가가 전달해주게 되었고, 오늘날은 항공 우편을 통하여 전 세계 각국으로까지 그 우편업무의 영역을 넓혀가게 되었던 것이다. 로미오와 줄리에트도 그들의 사랑하는 마음을 연애편지로 주고받았고, ?내 이름의 빨강?의 주인공들인 카라와 셰큐레도 그들의 사랑하는 마음을 연애편지로 주고받았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속의 주인공들도 그들의 외롭고 쓸쓸한 마음을 상호간의 안부 편지로 주고받았고, 이상 시인과 김기림 시인도 그들의 외롭고 쓸쓸한 마음을 상호간의 안부 편지로 주고받았다. 편지의 양식도 그 나라마다 매우 다르겠지만, 편지의 유형도 그것을 다 분류할 수 없을 만큼 다종다양할 것이  다. 상호간의 의례적인 안부편지도 있고, 사랑하는 연인들의 연애편지도 있다. 감사의 편지도 있고, 그리움의 편지도 있다. 상호간에 의중을 떠보는 편지도 있고, 비밀결사회의의 소식을 알리는 편지도 있다. 억울한 자의 협박의 편지도 있고,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치는 자의 반성의 편지도 있다. 오늘날 종이 형식의 편지는 전자통신으로 대체되어가고 있는 실정이긴 하지만, 편지는 우리 인간들의 의사소통의 유일한 양식이라고 할 수가 있다. 편지는 더없이  세련되고 정교한 언어로 되어 있고, 우리 인간들은 그 편지를 통해서 타인들과 부단히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간다. 시와 소설도 편지의 형식이고, 모든 학문과 예술의 책들도 편지의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시와 소설, 그리고 모든 책들은 구체적인 개인들이 실제 생활에서 주고받는 편지는 아니지만, 그러나 그 책들은 다수의 독자들과의 의사소통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는 편지의 양식이 좀더 웅장하고 세련되게 변모되었을 뿐인 것이다. 모든 문학은 서간문학이며, 모든 책들도 서사문학이 양식화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편지를 쓰기 이전의 그는 홀로 있는 존재이며, 홀로 있는 존재는 홀로서기를 시도하고 있는 존재이다. 그러나 홀로 있되, 홀로서기를 이룩하지 못한 존재는 레비나스의 말대로 ‘익명적 존재’, 즉 ‘존재자 없는 존재’에 불과한데, 왜냐하면 그는 아직도 자기 자신의 주체성(홀로서기)을 완성하지 못한 존재이며, 자기 자신과 타자, 그리고 ‘거울 속의 나’와 ‘거울 밖의 나’를 분간하지 못하는 존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홀로서기를 이룩한 존재는 그 ‘익명적 존재’, 즉 ‘존재자 없는 존재’의 껍질을 뚫고 주체성(홀로서기)을 완성한 존재인데, 왜냐하면 자기 자신과 타자, 말과 사물, ‘거울 속의 나’와 ‘거울 밖의 나’를 분명히 분간하고 자기 자신만의 사유와 세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존재자, 즉, 그 주체성을 완성한 존재는 타인들을 하나의 수단이나 도구로 생각하지 않고 이 세계를 함께 살아가야 할 동료로서 인식하게 된다. ‘존재에서 존재자로, 존재자에서 타자로의 이행’을 레비나스는 ‘존재론적 모험’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나는 이러한 과정을 ‘주체성의 완성’과 ‘타자성의 완성’, 그리고 ‘자아 영역의 확대’와 ‘세계 영역의 확대’로 설명을 한 바가 있다. 편지를 쓴다는 것은 자기 자신만의 사유와 세계를 갖고 있다는 증거이며, 그리고 그 편지가 타인들에게 전달될 것이라는 점에서, 그 편지는 타자성의 완성의 증거가 된다. 시인이 편지를 쓰는 행위는 대부분이 이타적인 행위 ―반드시 그렇지는 않겠지만―이며, 우리는 그 편지를 통해서 타인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간다.

  정숙자 시인은 1988년 ?문학정신」으로 등단한 이후, ?감성채집기?, ?정읍사의 달밤처럼?, ?열매보다 강한 잎? 등의 시집을 출간한 시인이지만, ?열매보다 강한 잎? 이전에는 별다른 주목을 받아 보지 못했던 시인이다. 그것은 정숙자 시인의 시가 수준 미달이거나 평범했기 때문이 아니라, 학연과 혈연과 지연에 의한 인간관계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정숙자 시인은 언제, 어느 때나 곧고 정결한 성품을 지녔으며, 하늘을 우러러 한 점의 부끄러움이 없을 정도로 대쪽같이 곧고 바른, 시인 정신을 지녔다고 나는 믿고 있다. 나는 오래 전부터 정숙자 시인의 수많은 편지들을 받아 보았고 ―단 한 번도 답장을 쓰지 않고 전화로 인사를 하는 결례를 범하기는 했지만―, 정숙자 시인이 직접 만든 재생의 편지봉투와 매우 아름답고 예쁜 글씨와 그 아름답고 깨끗하며, 더,더군다나 군더더기가 단 하나도 없었던 문장들은 언제, 어느 때나 나의 마음을 사로잡고, 또, 그리고 나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나는 그 감사함의 표시로서 ‘언어의 사원에서’라는 산문 연재를 청탁했던 것이고, 따라서 정숙자 시인이 그 고귀하고 우아한 천성으로 쓴 그 산문들은 2002년 여름호부터 2004년 겨울호까지, 즉 3년 동안, 우리 ?애지?의 모든 독자들의 심금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정숙자 시인의 「내 오십의 부록」은 ‘부록’이 아닌, ‘본문’이며, 그리고 이 작품은 시인의 대표작에 해당된다. 편지쓰기는 그의 생활 자체 ―하루 하루의 징검다리를 놓는 일―이며, 그것은 그의 구도 행위가 된다. 정숙자 시인은 회의주의자의 불행한 의식으로 쓰지 않고, 낙천주의자의 행복한 의식으로 그 편지를 쓴다. 우선 시인은 “편지는 내 징검다리 첫 돌이었다/ 어릴 적엔 동네 할머니들의 대필로 편지를” 썼다고 말하고, “고향 떠난 뒤로는 아버님께 용돈 부쳐드리며 ‘제 걱정은 마세요’ 편지를” 썼다고 말한다. 어릴 적에 동네 할머니들의 대필로 편지를 썼다는 것은 그 대필 편지를 통해서 동네 할머니들의 삶의 애환과 그 기쁨을 깨달았다는 것을 뜻하고, 고향을 떠난 뒤로는 아버님께 용돈 부쳐드리며 편지를 썼다는 것은 아버님에 대한 문안 인사와 함께,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는 것을 뜻한다. “매일 밤 내 동생 인자”와 “두례”에게도 편지를 썼다는 것은 그 어느 누구보다도 친밀한 자매지간들로서 사소하면서도 그만큼 중요한 사연들을 전했다는 것을 뜻하고, “시인이 되고부터는 책 보내온 문인들에게 편지를” 썼다는 것은 동료 문인으로서 서로간의 위로와 그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는 것을 뜻한다. “마음 한 구석 다쳤을 때는 구름에게 바람에게 편지를” 썼다는 것은 진정으로 상처입은 시인의 자기 위로의 형식이었다는 것을 뜻하고, “돌아가신 어머니가 그리울 때는 저승으로 편지를” 썼다는 것은 어머니를 사랑하는 마음이 저승에까지 가닿았다는 것을 뜻한다. 진정으로 상처를 입고 괴로워하는 사람은 부모형제들과 친구들에게 편지를 쓰지 않고, “구름에게 바람에게 편지를” 쓰게 되는 데, 왜냐하면 그의 상처 입은 마음이 ‘구름처럼’, ‘바람처럼’ 이 세상 그 어디엔가로 멀리 멀리 떠나가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또한 정숙자 시인이 “조용한 산책로에선 풀잎에게 벌레에게 공기에게도 편지”를 썼다는 것은 인간중심주의를 떠나서 모든 생명체들과 따뜻한 동료애를 교환했다는 것을 뜻하고, “희망이 꺾일 때마다 하느님께 편지를” 썼다는 것은 절망한 자의 간절한 기원의 형식이었다는 것을 뜻한다. 또, 그리고, 이밖에도 정숙자 시인은 “춥고 외로울 때는 언젠가 묻어준 고양이 무덤 앞에서 우울을 누르며 편지를 썼다”고 고백하고, 또,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가 발표한 모든 시들마저도 “한 눈금만 들여다보면 모습을 바꾼 편지에 다름 아니다”라고 고백한다. 모든 문학은 서간문학이며, 모든 책들도 이 서간문학이 양식화된 것이다.


   편지는 내 초라한 삶을 세상으로 이어준 외나무다리, 혹은

   맑고 따뜻한 돌다리였다

   편지가 있어 내 하루하루는 식지 않았다

   한 가닥 화려함 잃지 않았다

   편지봉투 만들고, 편지지 접고, 우표를 붙일 때마다

   시간과 나는 서로를 사랑하고 용서하고 또 믿었다

   그리고 그 조그만 빛이 다음 번 징검돌이 되고는 했다


   만일, 그렇다면, 왜 정숙자 시인은 그처럼 끈질기게 편지를 썼던 것일까? 그의 편지는 더 이상 단순한 안부편지도 아니었고, 연애편지도 아니었다. 비밀결사의 편지도 아니었고, 타인들을 독살하려는 중상모략자의 편지도 아니었다. 그리고 감사함이나 그리움만의 편지도 아니었고, 협박이나 양심의 가책의 편지도 아니었다. 그의 편지는 이 모든 것의 총화이면서도, 그러나 그 편지는 그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 자체이었던 것이다. 편지는 정숙자 시인의 외나무다리였고, 돌다리였고, 사랑이었고, 세상으로 향한 열린 창이었고, 우주였고,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의 시였다. 편지는 그의 시였고, 시는 그의 고통의 해방자였다. 따라서 정숙자 시인은 본문보다도 더욱 더 아름다운 「내 오십의 부록」을 써놓고, 어렵고 힘든 삶을 살아가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고 또 쓰라’고 권유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편지를 쓴다는 것은 징검다리를 건너간다는 것이며, 징검다리를 건너간다는 것은 어떠한 위험이나 고통, 또 그리고 어떠한 장애물이나 절망도 다 극복해내겠다는 것이다. 편지를 쓴다는 것은 고통, 절망, 체념, 후회, 슬픔, 좌절, 우울, 쓸쓸함 등을 모두가 멋진 기수처럼 극복해내겠다는 것이며, 이 세상을 더욱 더 아름답고 풍요롭게 살아가겠다는 것이다.

   우선, 편지를 쓰고 또 써보아라! 그러면 그대들은 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답고 풍요로운가를 알게 될 것이다. 정숙자 시인은 오늘도, 지금 이 순간에도, 편지를 통해서 시를 쓰고, 시를 쓰면서 아주 행복하게 살아간다.

  정숙자 시인은 서간문학의 기수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인이라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 반경환/ 충북 청주 출생,1988년 <한국문학> 시인상. 198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 이 글이 수록된 책『반경환 명시 감상 1』(종려나무,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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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애지> 2007-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