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시집· 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

제9회 질마재문학상 대표시/ 액체계단 외 4편 : 정숙자

검지 정숙자 2018. 5. 31. 14:01

 

<특집_제9회 질마재문학상 대표시>

 

   액체계단 외 4편

 

   정숙자

 

 

  직각이 흐르네

  직각을 노래하네

  직각

     직각

        직각 한사코 객관적인

  도시의 계단들은 경사와 수평, 깊이까지도

  하늘 깊숙이 끌고 흐르네

 

  날개가 푸르네

  날개가 솟구치네

  다음

     다음

        다음 기필코 상승하는

  건축의 날개들은 수직과 나선, 측면까지도

  성운 깊숙이 깃을 들이네

 

  설계와 이상, 노고와 탄력, 눈물의 범주, 계단은 피와 뼈와 근면의 조직

을 요구하네. 인간이 만들지만 결국 신의 소유가 되는, 그리하여 쉽사리

올라설 수도 콧노래 뿌리며 내려설 수도 없는 영역이 되고 만다네.

 

  바로, 똑바로, 직각으로 날아오른 계단은 자신의 DNA를 모두에게 요구

하네. 허튼, 무른, 휘청거리는 발목을 수용치 않네. 가로, 세로, 직각으로

눈뜬 모서리마다 부딪치며 흐르는 물소리 콸콸 콸콸콸 노상 울리네.

 

  계단의 승/강은 눈 VS 눈이네. 한 계단 한 계단 한 걸음 한 걸음 한눈파

는 눈으로는 안녕불가. 생사의 성패의 지엄한 잣대가 계단 밑 급류에 있

네. 너무 익숙히, 너무 가까이, 너무나 친근히 요주의 팻말도 없이.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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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남은 니체들

 

 

  그들, 발자국은 뜨겁다

  그들이 그런 발자국을 만든 게 아니라

  그들에게 그런 불/길이 맡겨졌던 것이다

 

  오른발이 타버리기 전

  왼발을 내딛고

  왼발 내딛는 사이

  오른발을 식혀야 했다

 

  그들에게 휴식이라곤 주어지지 않았다

  누군가 도움이 될 수도 없었다

  태어나기 이전에 벌써

  그런 불/길이 채워졌기에!

 

  삶이란 견딤일 뿐이었다. 게다가 그 목록은 자신이 택하거나 설정한 것

도 아니었다. 다만 그럴 수밖에 없었으므로 왼발과 오른발에 (끊임없이) 달

빛과 모래를 끼얹을 뿐이었다.

 

  우기에조차 불/길은 지지 않았다. 혹자는 스스로, 혹자는 느긋이 죽음

에 주검을 납부했다고, 머나먼 묘비명을 읽는 자들이… 뒤늦은 꽃을 바

치며 대신 울었다

 

  늘 생각해야 했고

  생각에서 벗어나야 했던 그들

  피해도, 피하려 해도, 어쩌지 못한 불꿏들

  결코 퇴화될 수 없는 독백들

  물결치는 산맥들

 

  강물을 거스르는 서고書庫에서, 이제 막 광기에 진입한 니체들의 술잔 속

에서 마침내 도달해야 할 불/길, 속에서 달아나도, 달아나도 쫓아오

는 세상 밖 숲속에서.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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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의 충돌

 

  천 년 전에 출발한 시간이 있다

  천 년 전에 출발한

  그 시간은

  무수한 시간과 시간 사이를 뚫고 이곳에 왔다

  내 곁을 지나는 지금 이 순간도 천 년 전에 출발한 시간일 거야

 

  천 년 전 그 시간은 내가 빚었을 수도,

  다른 누군가가 보낸 것일지도 몰라

  희한한 맛과 모양과 명암이 내재된 시간; 시간들

 

  때론 꽃이거나 바위이거나 살쾡이이거나 달이지만

  어떤 시간도 나를 향해 출발한 이상 무를 수 없지

  시간에게 되돌림이란 '절대 불가' 아닌가

  비켜서 볼까 애쓴들 그 애씀마저도

  천 년 전에 출발한 현재일 따름

 

  며칠 전, 투신 자살자가 행인을 덮쳐 두 명이 즉사했다는, 그 어처구

니를 설명할 길이란 부재. 우연이라고 밀어붙여도 석연치 않다. 천 년 전

에 출발한 이상 시간과 시간이 된통 엉킨 거라고 밖엔,

 

  시간에도 관성이 있는가 보다

  천 년을 달려온 속도와 방향이라면

  휠 틈도 꺾을 수도 없는 거겠지

  감각을 넘어선 그 시간의 실체가 바로

  나, 자신의 신체 아닐까?

 

  가령 어느 날 내가 죽었다 해도

  나를 통과한 시간만큼은 더 멀리 가고 있을 거야

  지구를 벗어난 어딘가로, 수수 광년 밖으로

  거기 또 내가 서 있을지도 모르지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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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돌

 

 

  나는 이미 유골이다. 나는 이미 골백번도 더 유골이다. 골백번도 더 자

살했고 골백번도 더 타살됐고 그때마다 조금씩 더 새롭게 어리석게 새롭게

어리석게 눈떴다.

 

  파도야, 보이느냐?

  파도야, 보이느냐?

 

  나는 항상 유골이다. 살았어도 죽었어도 떠도는 유골이다. 나는 골백번

도 더 죽었고 골백번도 더 눈뜰 수밖에 없었던 유골이다. 나는 늘 어리석

어서 죽었고, 어리석은 줄 몰랐다가 죽었고, 어리석어서 살아났다. 더 죽을

이유도 없는데 죽었고 더 살 필요도 없는데 살았다.

 

  유골에게 걸칠 거라곤 바람뿐

  유골에겐 바람만이 배부를 뿐

 

  그래도 나는 저놈의 태양을 사랑하노라. 저놈의 태양 말고 무엇을 또 사

랑할 수 있단 말이냐. 파도야, 그리고 너를 사랑하노라. 파도야! 파도야! 함

께할밖에 없노라.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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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 속의 너트

 

   

  꽃 속에 너트가 있다(면

  혹자는 뭇 믿을지도 몰라, 하지만 꽃 속엔 분명 너트가 있지.

그것도 아주아주 섬세하고 뜨겁고 총명한 너트가 말이야.)

 

  난 평생토록 꽃 속의 너트를 봐왔어(라고 말하면

  혹자는 내 뇌를 의심하겠지. 하지만 나는 정신이상자가 아니고 꽃 속엔 분명 너트가 있어. 혹자는 혹 반박할까? '증거를 대 봐, 어서 대 보라고!' 거참 딱하구나. 그 묘한 어떻게 대 볼 수 있담.) 

 

  꽃 속에 너트가 없다면 아예 꽃 자체가 없었을 (이야!

  힘껏 되받을 수밖에. 암튼 꽃 속엔 꽉꽉 조일 수 있는 너트가 파인 게

사실이야. 더더구나 너트는 알맞게 느긋이 또는 팍팍 풀 수도 있다니까.)

 

  꽃봉오릴 봐 봐(요.

  한 잎 한 잎 얼마나 단단히 조였는지. 햇살 한 올, 빗방울 하나, 바람 한

줄기, 먼 천둥소리와 구름의 이동, 별들의 애환까지도 다 모은 거야. 그리

고 어느 날 은밀히 풀지.)

 

  꽃 속의 너트를 본 이후(부터

  '꽃이 피다"는 '꽃이 피-였다'예요. 어둠과 추위, 폭염과 물것 속에서도

정점을 빚어낸 탄력, 붉고 희고 노랗고 파란 피의 승화를 꽃이라 해요.

'꽃이 피다!' 그렇죠, 그래요, 그렇습니다.)

 

  그늘을 지우는 꽃(을

  신들이 켜놓은 등불이라 부를까요? 꽃이 없다면 대낮일지라도 사뭇 침

침할 겁니다. 바로 지금 한 송이 너트 안에 한 줄기 바람이 끼어드는군요.

아~ 얏~ 파도치는 황홀이 어제 없던 태양을 예인합니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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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네르바2018-여름호 <특집 제9회 질마재문학상 수상자 정숙자 시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