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에서 주소를 찾다/ 정숙자 공중에서 주소를 찾다 정숙자 구름 한 점 풀린다 여기저기 묻혀 있던 풀씨들이 쑥쑥 자라 천수천안 가득히 햇살을 끌어들인다 봄 여름, 어른과 아이, 색색깔 상여와 흰 상여가 가뭇없이 사라지고 또 나부끼고 휘파람 한 오리 꺾어 날리며 자전거와 청년과 비뚜로 쓴 밀짚모자가 바람 순한.. 내 품에 남은 나의 시 2018.05.23
토지세 자진납부/ 정숙자 토지세 자진납부 정숙자 민들레꽃 얼비친 얼굴들이 차례를 기다린다 오늘, 마감일을 놓치면 안되는 거다 이 땅에 뿌리내린 풀뿌리치고 토지세! 비껴 설 줄이 있던가? 우린 네 식구에 스물두어 평 한앞에 5평 남짓 지구를 그리어 가진 셈이다 십몇만 몇천몇백 원… 팡팡팡 수납인 찍히는 .. 내 품에 남은 나의 시 2018.05.03
병(甁)/ 정숙자 병甁 정숙자 깨끗한 병들을 나는 좋아한다 집이 좀 넓다면 내버린 병들을 지금도 데리고 있었을 것이다 병들은 하나같이 중심이 잘 잡혀 있다 흰 병, 푸른 병, 갈색 병, 노랑 병 모두 비틀거리지 않는다 넘어지더라도 당당하게 뒹군다 긁히거나 조각났을 때조차 반짝인다 그들은 뚜껑을 .. 내 품에 남은 나의 시 2018.04.30
첫 번째 뱀의 기억/ 정숙자 첫 번째 뱀의 기억 정숙자 학교가 도시락 거리는 아니었다. 언제라도 집점심 먹고 다시금 걸어서 학교로 갔다 밀 이삭 비벼서 후후 까먹고 겨울이면 생고구마 한입씩 베물어 발라먹고는 끼짓 껍질이야 제기차기로 날려버리며 매양 혼자서 학교로 갔다 우리집은 전설같이 따뜻한 동네 끄.. 내 품에 남은 나의 시 2018.04.26
우산/ 정숙자 우산 정숙자 살대 하나 부러지면 빗방울 소리도 하늘도 찌그러지고 보슬비마저 어깨를 무네 태풍 부는 날 우산살들은 앙다물고 버팅기지만 몽달귀신 웃음 풀리면 삽시에 하얗게 뒤집힌다네 소낙비 무시로 들이치는 삶 사과꽃 비둘기 햇빛쪽빛 섞이는 날도 나는 우산을 생각한다네 살대 .. 내 품에 남은 나의 시 2018.04.22
내가 사랑했던 삶/ 정숙자 내가 사랑했던 삶 정숙자 늘 불행하다 외롭다 말했지만 돌아보는 그날들은 오늘에 비해 얼마나 즐거웠던가 대충 세운 희망과 미래도 무작정 믿음이 갔고 늙어진 어느 훗날은 행복하겠지 그때쯤엔 불행하지도 외롭지도 않겠지, 했다 그러나 그렇게도 믿었던 미래가 바로 오늘이건만 괴로.. 내 품에 남은 나의 시 2018.04.21
접속사/ 정숙자 접속사 정숙자 겨우 이만한 바이러스에 먹혀선 안 돼 이 바람에 지쳐선 안 돼 이런 구름은 앞으로 또 닥칠 거고 과거에도 들렀던 거야 어리둥절 시들면 안 돼 지느러미 멀쩡한데 뭘 아가미와 눈까풀도 말짱한데 뭘 나에겐 내가 있잖아 나에겐 나뿐이잖아 난 절대로 나를 놓아선 안 돼 북.. 내 품에 남은 나의 시 2017.12.04
외투/ 정숙자 외투 정숙자 가슴둘레 잘못 재면 어깨가 울지 목 잘못 재면 뒤품이 울고 총길이 등길이 소매길이 어디라도 잘못 재는 날이면 온몸 비뚤어지지 눈금 희미할 때면 침묵이 더 화사할지도 몰라 솔기 고운 말 한 벌 짓기 위하여 불씨도 당겨 놔야지 누구에겐가 입혀줄 만한, 누구에겐가 받고도.. 내 품에 남은 나의 시 2017.12.04
김제ㅅ벌 사계/ 정숙자 김제ㅅ벌 四季 정숙자 톡 튀어나는 놈 없이 고르게 고르게 자라는 그들, 들녘 가득히 보며 자랐다 벼 보리 콩 조 수 수… 하늘껏 쏟아부은 만 섬 이슬도, 햇덩어리 하나 자디잘게 바수어 나누어 먹고 도란도란 살을 비볐다 그 가운데 유독 염치없는 피만이 목을 쳐들어 농부의 그늘에서 뽑.. 내 품에 남은 나의 시 2017.0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