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ㅅ벌 四季
정숙자
톡 튀어나는 놈 없이 고르게 고르게
자라는 그들, 들녘 가득히 보며 자랐다
벼 보리 콩 조 수 수…
하늘껏 쏟아부은 만 섬 이슬도, 햇덩어리 하나
자디잘게 바수어 나누어 먹고
도란도란 살을 비볐다
그 가운데 유독 염치없는 피만이 목을 쳐들어
농부의 그늘에서 뽑혀 나가고…
바람 한 줄기 지날 때에도 김제ㅅ벌 너른 들판은
함께 숙이고 함께 일어섰다. 그 범패조 아래
호미자루 땀을 식히고
홍고추 참깨꽃도 또록또록 힘이 잡혔다
석 달 열흘 가뭄 든 여름
포효하며 갈라지는 벼랑에서도
벼포기들은 어느 하나 열(列) 흐틀지 않고
조선 사나이 사육신처럼
선지빛 땡볕 꼿꼿하게 깨물고 몸을 사뤘다
그 평상심으로 碧骨堤 논틀밭틀은
豆乃山 사람을, 만백성들을
먹이고, 키우고, 어루만지고 평온케 했다
그러나 그렇게나 푸른 만경강 언덕
상제나비 같은 우리 부모님
어깨 무너지는 짐 지고 늙고… 그 땀 디딘
우리 여섯 남매는 더듬이 오롯한 범나비가 되어갔다
모악산 천둥 타고 가을이 올 제
순도 99.9 퍼센트 쟁쟁히 영근 황금이슬들
달도나 거기 논두렁 달은
왕희지가 흘린 「天下之大本」 , 남실남실
곁두리로 딸려나온 탁배기 바가지였네
시방도 손거울 뒤로 줄지어 날아가는 겨울 철새들
끼룩끼룩 그 어눌한 목울음 소린, 눈만 뻥한
내 사춘기 겁나게 흔들곤 했지
그렇지만 설만 비끼면 햇살 직속으로 꽂히던 들판
벼 보리 콩 조 수수…
톡 튀어나는 놈 없이 고르게 고르게
"어이, 돌쇠!" "어이, 막둥이!"
수인사 챙겨온 마을 사람들
참으로는 그들이 김제ㅅ벌 四季
선사시대 백제도 고인 동그람 동그람한 낟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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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9년 6월 현대시학회 '시제'/ 낭독
* 2001년 5월호『월간문학』/ 발표
* 정숙자/ 1952년 전북 김제 출생, 1988년 『문학정신』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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