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품에 남은 나의 시

김제ㅅ벌 사계/ 정숙자

검지 정숙자 2017. 7. 28. 12:30

 

 

     김제ㅅ벌 四季

 

     정숙자

 

 

  톡 튀어나는 놈 없이 고르게 고르게

  자라는 그들, 들녘 가득히 보며 자랐다

  벼 보리 콩 조 수 수

  하늘껏 쏟아부은 만 섬 이슬도, 햇덩어리 하나

  자디잘게 바수어 나누어 먹고

  도란도란 살을 비볐다

  그 가운데 유독 염치없는 피만이 목을 쳐들어

  농부의 그늘에서 뽑혀 나가고…

  바람 한 줄기 지날 때에도 김제ㅅ벌 너른 들판은

  함께 숙이고 함께 일어섰다. 그 범패조 아래

  호미자루 땀을 식히고

  홍고추 참깨꽃도 또록또록 힘이 잡혔다

  석 달 열흘 가뭄 든 여름

  포효하며 갈라지는 벼랑에서도

  벼포기들은 어느 하나 열(列) 흐틀지 않고

  조선 사나이 사육신처럼

  선지빛 땡볕 꼿꼿하게 깨물고 몸을 사뤘다

  그 평상심으로 碧骨堤 논틀밭틀은

  豆乃山 사람을, 만백성들을

  먹이고, 키우고, 어루만지고 평온케 했다

  그러나 그렇게나 푸른 만경강 언덕

  상제나비 같은 우리 부모님

  어깨 무너지는 짐 지고 늙고 그 땀 디딘

  우리 여섯 남매는 더듬이 오롯한 범나비가 되어갔다

  모악산 천둥 타고 가을이 올 제

  순도 99.9 퍼센트 쟁쟁히 영근 황금이슬들

  달도나 거기 논두렁 달은

  왕희지가 흘린 「天下之大本」    , 남실남실

  곁두리로 딸려나온 탁배기 바가지였네

  시방도 손거울 뒤로 줄지어 날아가는 겨울 철새들

  끼룩끼룩 그 어눌한 목울음 소린, 눈만 뻥한

  내 사춘기 겁나게 흔들곤 했지

  그렇지만 설만 비끼면 햇살 직속으로 꽂히던 들판

  벼 보리 콩 조 수수

  톡 튀어나는 놈 없이 고르게 고르게

  "어이, 돌쇠!" "어이, 막둥이!"

  수인사 챙겨온 마을 사람들

  참으로는 그들이 김제ㅅ벌 四季

  선사시대 백제도 고인 동그람 동그람한 낟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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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9년 6월 현대시학회 '시제'/ 낭독

   *  2001년 5월호『월간문학』/ 발표 

  * 정숙자/ 1952년 전북 김제 출생, 1988년 『문학정신』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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