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본 시집
정재율
읽고 싶은 시집이 절판되었다 할 수 없이 도서관에 가 초판본 시집을 구했는데 열어보니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시 옆으로 낙서도 되어 있었다 초록색의 표지가 흙색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손들을 거쳐갔을까 생각했다 책등 사이로 갈색 점들이 보였다 책상에 앉아 시집을 쫙 펼쳤더니 가루들이 후드득하고 떨어졌다 중반쯤 읽었을 때 몸이 간지럽기 시작했다 한번 신경이 쓰이고 나니까 온몸이 간지러운 것처럼 집에 돌아와서도 밤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다음날 피부과에 갔더니 작은 벌레에 물렸다고 했다 눈 밑에 있는 미세한 점을 기가 막히게 물어서 나중에 딱지가 떨어지면 점이 더 진해 보일 수도 있다고 말하셨다 나는 알겠다고 하고 받아온 약을 챙겨 먹었다 연고를 바르고 억울한 마음에 친한 선생님께 전화해 도대체 왜 저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요? 하고 하소연을 했다 선생님은 웃으면서 선택당한 거 아니에요? 별 수 없죠 계속 쓸 수밖에, 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무슨 소리냐고 물었지만
다시 책상 앞에 앉아 시집을 펼쳤다 무언가 이해해 보려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떠 보았다 눈앞에 작은 미물들이 생겼다가 사라졌다 눈 밑에 점이 확실히 진해지고 있었다
--------------
* 『문파 MUNPA』 2022-봄(63)호 <시마당> 에서
* 정재율/ 2019년『현대문학』으로 등단
'잡지에서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김동진_사소함으로 쌓은 시(발췌)/ 세워둔 연못 : 안도현 (0) | 2022.04.04 |
|---|---|
| 송희복_무(巫)와 역(易)의 생태 감성(발췌)/ 대추 한 알 : 장석주 (0) | 2022.04.04 |
| 폭설, 손가락들/ 정재학 (0) | 2022.04.03 |
| 진열은 사열이다/ 김송포 (0) | 2022.04.02 |
| 옹관(甕棺)/ 차주일 (0) | 2022.04.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