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김효숙_사월의 통각을 짚어내다(발췌)/ 재봉틀과 오븐 : 박연준

검지 정숙자 2022. 3. 19. 00:01

 

    재봉틀과 오븐

 

    박연준

 

 

  늙는다는 건

  시간의 구겨진 옷을 입는 일

 

  모퉁이에서 빵 냄새가 피어오르는데

  빵을 살 수 있는 시간이 사라진다

 

  미소를 구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높은 곳에 올라가면

  기억이 사라진다

  신발을 벗고 아래로 내려오면

  등을 둥글게 말고

  죽은 시간 속으로 처박히는 얼굴

  할머니가 죽은 게 사월이었나,

  사월

  그리고 사  

 

  물어볼 사람이 없다

  당신과 나를 아는 사람은 모두 죽거나

  죽은 것보다 멀리 있다

 

  사랑을 위해선 힘이 필요해,

  라고 말한 사람은 여기에 없다

  만우절에 죽었다 그의 등.

  얼굴,

  미소를

  구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사랑과 늙음과 슬픔

  셋 중 무엇이 힘이 셀까

  저울로 들고 오는데

 

  힘은 무게가 아니다

  힘은 들어볼 수 없다

 

  재봉틀 앞에 앉아 있고 싶다

  무엇도 꿰매지 않으면서

 

  누가 빵을 사러 가자고 노크하지만

  구겨진 옷을 내밀고

  문을 닫겠다

  

  당신은 내 앞에 내려앉은 한 벌의 옷

 

  사랑한 건 농담이었어

  당신이 변명하면

 

  깨진 이마 같은 걸 그려볼 것이다

  웃을게요 나는,

  웃음을 굽겠습니다

    -전문, 『문학동네』 2021-여름호

 

   사월의 통각을 짚어내다(발췌)_ 김효숙/ 문학평론가

  이 시에는 사랑의 불가능성을 성토하려는 의도는 없다. 사랑을 말하려면 무게의 강박에서 해방되라고 시인은 말한다. 꿰매는 일과 굽는 일을 잘하는 재봉틀과 오븐처럼, 사랑도 상대방을 위해 무언가 할 수 있는 능력 안에서먄 사랑인 것이다. 하여 화자는 사랑의 수행 방식과 그 강박에 대해 적극적으로 의심해보고 있다. "무엇도 꿰매지 않"는 재봉틀 앞에 망연히 앉아 있는 자처럼, "누가 빵을 사러 가자고 노크"하자 구겨진 옷가지만 허언처럼 내밀면서 정작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알맹이를 텅 비워버릴 수는 없을지 생각해본다. 이 기구들 앞에 앉으면 기능에 걸맞는 행위를 해야 한다는 강령은 교과서 같은 도덕이다. 하고자 하는 의지와 열망을 가질 때만이 화자의 가사노동은, 나아가 사랑 작업은 윤리의 자리로 내려온다. '당신'이 먼저 그것을 실행했지 않은가. 사랑이 농담 같은 것이었다고 말하면서 당신은 모든 진지하고 심각한 약속들로부터 해방을 꾀했다. 그 때문에 화자도 이마를 짚으며 심각해질 필요 없이 사랑을 정의하는 당신의 농담과 변명 앞에서 가볍게 웃음을 날릴 수 있다. 무게를 강압하는 것들과, 농담처럼 가벼운 것들 중 어느 쪽이 사랑인가라는 질문에는 따라서 '진정한' 같은 수사를 달아놓을 수 없다. 재봉틀은 꿰매고 오븐은 굽는 것처럼 사랑도 '하는' 것이다. 꿰맬 수 있는 능력과 구울 수 있는 능력을 가동할 때에만 기구인 것처럼 사랑도 역시 그렇다. (p. 시 181-183/ 론 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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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파 MUNPA』 2021-가을(61)호 <문파가 읽기 좋은 시>에서

  * 김효숙/ 2017년 《서울신문》 문학평론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