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글자들 외 1편
김화연
밤이면
모닥불도 아닌데
낯 뜨거운 글자들
밤새워 아파트 베란다 문에서
막 헤어진 여인의 뒷모습을 비추는
따가운 못처럼
반짝이는 신의 거처들
원래 글자들은 물처럼 흘러야 명필名筆이라 했다
명필은 물기 가득한 풀꽃처럼 피고 흔들리고 유연했다 엄마의 안부 편지에는 고향 집 뒤뜰 닭 울음과 담벼락에 걸쳐 앉은 빨간 감, 가을볕만 반겼던 노란 국화가 집안의 근황을 담고 있었다 굵고 마딘 엄마의 필체는 굴뚝의 연기를 닮았고 흰 옷고름처럼 단단히 여며 있다
검은 글자들이 언제부터
붉은색으로 밤을 가르치고 있다
배달 음식을 시키듯
좌판을 두드린다
복사되어 나오는 글자는 검은 잉크의 바탕체
잎이 없는 나뭇가지에서 떨어지는
판박이들의 문자들
그 옛날 나는 흔들리는 불빛 밑에서
어른거리는 글자를 익혔다
여름 나무들처럼
풀꽃처럼
불 끄면 캄캄해지던
그런 글자와 살았다
잠자는 문풍지에 비추는
초승달 옷고름의 흐느낌을 보면서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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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추들의 체온
계절은 옷을 따라 돈다
입춘으로 가는 달력의 숫자
손은 봄옷으로 이동한다
입지 않은 옷을 꺼내면
풀어져 있는 단추들이 내 몸을 끌어당긴다
접힌 자국마다 꽃물이 엎질러져 있거나
쌀쌀한 바람이 주름으로 있다
지난 봄꽃 물들은 얼룩이 옷의 살점이다
목 밑에서 허리 근처까지
단추들의 온도계에는 수은주 눈금이 있어
오늘의 날씨에 오르락내리락한다
미세먼지 묻은 옷을 빨아
빨랫줄에 걸어 놓으면
풀린 단추 사이로 물이 뚝뚝 떨어진다
옷의 살점 허물을 벗고 있다
말라 가는 단추들의 체온
햇볕으로 달여진 옷은 몸의 체온을 기다린다
오래 입은 옷에서
실뿌리 같은 실밥을 끊고 툭 떨어지는 단추
씨앗이 되고 싶다는 외침의 소리
흔들이 단추는 매무새에서 일탈하고
똑딱이 단추는 짝을 찾아서 헤맨다
아침을 닫고 저녁을 푸는 단추들의 역설법
편하게 내어 준 단추는 고집이 없다
거꾸로 매달아도 옷감을 끌어당기지 않는 단추
사계절이 맨 앞에서 달리는 단추들
단추의 매무새에는
급행열차의 두 번째 칸의 무심한 이야기가 있고
이별의 전조 속 뚝뚝 흘리는 눈물이 있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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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단추들의 체온』에서/ 2022. 1. 28. <시작> 펴냄
* 김화연/ 전북 순창 출생, 2015년『시현실』로 등단, 시집『내일도 나하고 놀래』『소낙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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