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바람이 쓴 글/ 정복선

검지 정숙자 2022. 2. 27. 02:03

 

    바람이 쓴 글

 

    정복선

 

 

  아픔도 꽃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순간

  아 아픔은 꽃이 되었구나 라고 깨달았습니다

  남들이 몇십 년 걸려 돌아올 거리를

  천만 리나 헤매어 다녔습니다

  너무 많은 것들을 보았고 숨 쉬었습니다

  이를테면 바람의 몸뚱어리와 날카로운 발톱

  바람의 머리칼과 타오르는 눈빛 그리고 들키지 않게

  둘러쓰는 바람의 망토까지도 샅샅이 뒤졌기에

  바람, 하면 긴 숨을 토해 내는 것입니다

  본 것은 안 본 것으로 되돌릴 수가 없지요

  있던 것은 영원한 없음으로 보내 버릴 수도 없습니다

  왜 그토록 오래 아파야 했는지

  왜 그토록 덧문 흔들어 댔는지

  핏방울마다 피어난 꽃숭어리

  그것이 내가 쓴 혈서입니다

    -전문-

 

  서정을 향하다> 한 문장: 시는 어쩌면 내 삶의 도처에서 내가 발견해 주기를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전라북도 분지盆地

에서 태어나서 자라며, 부드러운 산세山勢와 냇물, 대숲, 감나무들, 소나무들과 벚나무들의 자연에 속해 있었기에, 이미 유년에 충분히 심미적 경험을 한 것일까. 내가 딴 데서 해찰하는 동안에도 시는 줄곧 삶의 곳곳에서 돋아나곤 했던 것 같다.// 일찍이 어떤 결핍을 인식하기 이전부터 내 안에서 용솟음치는 미지未知의 생명력을 느껴서 예술 쪽 길을 원했었지만, 끝없는 열망과 되풀이된 좌절 끝에야 문득 시가 눈에 띄었고, 시가 내 생애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해 주었기에, 한사코 붙든 나의 마지막 별빛이 된 셈이다.// 시에 매혹되고 보니, 온갖 결핍과 절망, 희망이 시의 연료가 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지금껏 내가 써 온 서정시는 결국, 온갖 이성과 감정의 소용돌이나 출렁임이 정화되어 흐르는 샘물이고, 이 지구에 와서 부대끼며 살아가며 잊어버리고 잃어버린 무구無垢함에 대한 추억이다. (p. 시 33/ 론105-117) (저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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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선집 『젊음이 이름을 적고 갔네』에서/ 2022. 2.10. <문예바다> 펴냄  

  * 정복선/ 1948년 전북 전주 출생, 1988년『시대문학』으로 등단, 시집『종이비행기가 내게 날아든다면』『마음여행』『여유당 시편』등 7권, 영한시집『Sand Relief』, 평론집『호모 노마드의 시적 모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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