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희망의 내용 없음/ 육호수

검지 정숙자 2022. 2. 19. 02:11

 

    희망의 내용 없음

 

    육호수

 

 

  우리가 우리에게

  발각되지 않는 곳으로 가자

 

  더 많은 공기를 정화할

  더 많은 허파가 필요한

  오래된 세계에서

 

  더 많은 빙하를 녹일 더 많은 체온이

  더 많은 어둠을 흡착할 더 많은 악몽이

  더 많은 멸종을 지켜봐줄 더 많은 마음이 필요한

  오래된 세계에서

 

  사람인 채로 더 이상

  망가지고 싶지 않아

 

  적막 속에 찾아오는 수치심은 아름다웠음

  몸을 떠난 살은 몸보다 먼저 썩었음

  희망의 내용 없음

 

  여러 겹의 몸을

  몸 위에 겹쳐지는 무수한 유령들을

  허물로 남겨두고

  밤의 아름다움을 감당하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가자

  푸른 하늘 은하수 끝나지 않는 손장난

  밤이 기어이 밤을 어기는 곳으로

 

  우리라고 부를 이 없음

  우주선 없음

  다른 세계 없음

  희망의 내용 없음

 

  내가 너에게 발각되지 않는 곳에서

  울지 않고 기다릴게

  거울에 갇힌 구름은 갈 수 없는 곳

  어린 신의 어항 속

  천사의 아가미를 달고

  면벽의 안식 속에 감금되어

  죽음과의 문답으로부터 소외되어

 

  나의 굴레만을 나의 것으로

  소유자 없는 나의 소유로 여기며

  기다리는 이 없는 기다란

  기다림

  무색무취 수신자 없는 기도를

  잇고 있을게

 

  오래된 세계에서

  지나치게 외로워서

  지나치게 정직했음

  영원에 진 빚 없음

    -전문, 『어느 푸른 저녁』(공저,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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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징학 연구소』 2022-봄(5)호 <육호수/ 대표시> 에서  

  * 육호수/ 1991년 출생, 2016년<대산대학문학상>수상으로 등단, 시집 『나는 오늘 혼자 바다에 갈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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