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오솔길
정숙자
너희들 왜 이렇게 많이 눈에 뜨이는지 모르겠구나. 지렁이야,
비오는 날이 너희들에겐 명절인 줄 알았더니 보도블럭의 오솔
길에서 셀 수도 없이 많은 너희들 시신을 보게 되었다. 뭐 꼭이
살아 있어야만 좋다는 건 아니야. 죽음은 오히려 축하할 일일
수도 있지마는 한결같이 밟힘으로 인한 참사가 마음에 걸리는
구나. 난 말이다. 너희들이 혹시 자살한 게 아닐까 생각해 보기
도 했단다. 말하자면 의도적으로 행인들에게 밟힌 운명에의 항
거랄까- 운명에 항거한다는 건 죽음과 맞서는 일이거든. 비록
외모는 측은했을망정 측은한 행동 본 바 없는 너희들인데 안녕,
한 생애를 기어야만 했던 지렁이야. 이제사 땅 속이 아닌 햇빛
속을 날으려므나. 대지의 팔 안에 함께 살았던 우리는 옷이 다
른 자매였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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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이 화려한 침묵』에서/ 1993. 4. 26. <명문당> 발행
* 정숙자/ 1952년 전북 김제 출생, 1988년『문학정신』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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