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본破本 외 1편
마경덕
꽃잎의 실밥이 터지고 있다
한 묶음으로 제본된 봉오리는 과월호처럼 버려진다
교정을 마친 가지 끝에
희디흰 햇살이 꽂히고 봄의 속지에 물이 번져
목 좋은 자리에 전시된 목련,
출간을 하자마자 성급한 바람이 책장을 덮는다
제본공이 표지를 마무리할 때도 베스트셀러로 떠올랐다
하나하나 낱장을 이어붙인 문장들
긴 추위를 건너며 우리는 얼마나 눈부신 절창을 기대했는가
이하 생략···
이하 동문···
우수수 무더기로 넘어가는 꽃잎 활자에 야근을 하던 인쇄공도 손을 털었다
리뷰, 평점은 없었다
거리에 버려지는 봄의 파본들
여전히 바람과는 라이벌 관계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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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사진
운동장에 모인 우리들
층층이 나무의자를 쌓고 줄을 맞추고
키 작은 나는 맨 앞줄 가운데 앉았다
얌전히 두 손을 무릎에 얹고
사진사가 사진을 찍으려는 찰나,
선생님이 내 이름을 불렀다
고무신을 신었으니
뒤로 가라고,
운동화 신은 키 큰 아이를 불러 내 자리에 앉혔다
초등학교 앨범을 펼쳐도
맨 뒷줄
내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까치발로 서 있던 부끄러운 그 시간이
흑백사진 속 어딘가에 숨어있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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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악어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밤』에서/ 2022. 1. 3. <상상인> 펴냄
* 마경덕/ 200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신발論』『사물의 입』『그녀의 외로움은 B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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