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혼몽/ 엄세원

검지 정숙자 2021. 12. 27. 02:16

 

    혼몽

 

    엄세원

 

 

  한밤중이 엎질러 있다

  잠옷에 맨발인 채 집을 빠져나간다

 

  사냥꾼과 숨죽인 불안이 뒤따라오고

  아무도 다니지 않는 샛길로 격발을 끌고 간다

 

  이내 총구를 턱 가까이 바짝 들이민다

 

  쩍 금이 간 얼음 위로 화들짝 놀란 비오리가 푸드덕 날아오른다

 

  몇 번째인가, 총소리를 따라간 나는

  발칸반도 장미처럼 점점이 번진 핏자국에 익숙하다

 

  죽은 가지를 부여잡은 발자국이 어둡다

 

  피 묻은 잠옷이 길 위를 걷고 있다

 

  어느덧 사냥꾼은 없고

  어둠 속에 수없는 미제들이 서 있다

     -전문-

 

  해설> 한 문장: 삶은(인과관계와 같은) 필연성의 단순한 원리들로 해명되지 않는다. 확실한 통로 혹은 출구의 부재가 공포를 유발한다. 모더니스트들에게 20세기가 '악몽'이었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 점에서 세계는 그 자체 아포리아(aporia)이며, 삶은 영원한 "미제"이다. 우리는 우연성의 갑작스러운 폭력으로 얼마나 자주 "화들짝 놀"라는가. "한밤중"은 무지의 시간이며 분별이 사라진 공간이다. 그것은 알 수 없는 세계이므로 "불안"의 공간이고, "피 묻은 잠옷"을 연상케 하는 공포의 시간이다. (시 p. 74/ 론 121) (오민석/ 문학평론가, 단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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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숨, 들고나는 내력』에서/ 2021. 12. 15. <상상인> 펴냄

   * 엄세원/ 2014년 『강원문학』 시 부문 신인상 & 2021년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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