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4589 외 1편
엄세원
암호화된 내가 채혈실 전광판에 떴다
팔에서 빠져나간 피의 여정
슬픔의 궤가 드러난다
혈이 용기에 담겨 한 장의 차트로 분류된다
네안데르탈인의 2% 유전자를 물려받은 혈
두려움의 형체는 새하얗고
깊은 골짜기고 나를 끌어들인다
물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내가 한 장의 사진으로 증명될 때
몸은 병명을 새기는 메모리
어디까지 읽히고
어디까지 몸의 폴더인가
담당의사는 자판을 두드리면서
오 년 후에 봅시다
나를 파일 속으로 저장한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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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B
그날의 목격자는 4B 연필뿐이었다
칼날에서 심이 날리지 않도록 휴지 한 장이 배경이었다
거칠게 스케치하던 행위가 멈추는 순간
깊숙이 박힌 心이 빠진다
여자는 원근법을 사랑하는데
남자는 흑심을 품고 있어서
너무 짙은 근시
끝내 알 수 없는 진심
그날 이후 4B는 슬플悲
팔목은 언제나 선을 긋고 싶었다
다 잊은 일이다 중얼거려보아도
이젤이 핼쑥하다, 일종의 경고다
손끝이 엇나갈 때 H의 스케치도 흑심이었을까
멀미가 캔버스로 쏟아지고 입술을 더듬는다
첫 키스가 재현되다 뭉개진다
나무속에는 구멍이 뚫려 헛헛한 여자가 갇혀 있다
가늘고 선명하게 표현된 명암 속으로
안간힘이 삽화를 붙든 채
구도가 흔들리고 있는 관계
심을 보이기 위해 자신을 깎아내는 나무
점차 짧아져 쥘 수 없는 연애에
침을 삼킨 또 다른 HB가 기다리고 있을까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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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숨, 들고나는 내력』에서/ 2021. 12. 15. <상상인> 펴냄
* 엄세원/ 2014년 『강원문학』 시 부문 신인상 & 2021년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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