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A4589 외 1편/ 엄세원

검지 정숙자 2021. 12. 27. 02:39

 

    A4589 외 1편

 

    엄세원

 

 

  암호화된 내가 채혈실 전광판에 떴다

 

  팔에서 빠져나간 피의 여정

  슬픔의 궤가 드러난다

  혈이 용기에 담겨 한 장의 차트로 분류된다

 

  네안데르탈인의 2% 유전자를 물려받은 혈

  두려움의 형체는 새하얗고

 

  깊은 골짜기고 나를 끌어들인다

  물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내가 한 장의 사진으로 증명될 때

  몸은 병명을 새기는 메모리

 

  어디까지 읽히고

  어디까지 몸의 폴더인가

 

  담당의사는 자판을 두드리면서

  오 년 후에 봅시다

 

  나를 파일 속으로 저장한다 

     -전문-

 

      -----

      4B

 

 

  그날의 목격자는 4B 연필뿐이었다

  칼날에서 심이 날리지 않도록 휴지 한 장이 배경이었다

 

  거칠게 스케치하던 행위가 멈추는 순간

  깊숙이 박힌 心이 빠진다

 

  여자는 원근법을 사랑하는데

  남자는 흑심을 품고 있어서

  너무 짙은 근시

  끝내 알 수 없는 진심

 

  그날 이후 4B는 슬플悲

  팔목은 언제나 선을 긋고 싶었다

 

  다 잊은 일이다 중얼거려보아도

  이젤이 핼쑥하다, 일종의 경고다

 

  손끝이 엇나갈 때 H의 스케치도 흑심이었을까

  멀미가 캔버스로 쏟아지고 입술을 더듬는다

  첫 키스가 재현되다 뭉개진다

 

  나무속에는 구멍이 뚫려 헛헛한 여자가 갇혀 있다

  가늘고 선명하게 표현된 명암 속으로

  안간힘이 삽화를 붙든 채

 

  구도가 흔들리고 있는 관계

  심을 보이기 위해 자신을 깎아내는 나무

 

  점차 짧아져 쥘 수 없는 연애에

  침을 삼킨 또 다른 HB가 기다리고 있을까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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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숨, 들고나는 내력』에서/ 2021. 12. 15. <상상인> 펴냄

   * 엄세원/ 2014년 『강원문학』 시 부문 신인상 & 2021년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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