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눈금 외 1편/ 안은숙

검지 정숙자 2021. 12. 22. 00:28

 

    눈금 외 1편

 

    안은숙

 

 

  눈금만큼 제자리를 지키는 것도 없다

  어떤 무게가 얹혀도

  눈금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 표식

  무게쯤은 바르르 떠는 바늘에게나 준다

 

  달력에 숫자들로 있던 눈금엔

  요일의 불행이 얹혔다 간다

  날짜들,

  굵직한 일들은 눈금 속에서 달을 바꾸고

  몇백 년 흐르지 않고 견디는 돌다리 간격처럼

  건널 수 있는 눈금도 있다는 것

 

  빨간 무게가 가득 매달려 있는

  늦가을 가지들

  자잘한 열매들의 푸른 무게와 붉은

  무게의 계측이 끝나면 저절로 떨어지는 눈금이다

 

  저울의 눈금이란 가장 무거운 눈일까

 

  눈금이 눈을 뜰 때가 있다

  새 가지가 새 눈금을 만들며 자란다

 

  한여름부터 무게를 재면서 왔다

  떨어뜨리는 것도

  제 무게를 아는 것들만이 할 수 있는 일

 

  잠시 제자리에 멈추어본다

  딛고 있는 눈금을 모르니

  나는 지금의 내 무게도 모른다

  다만 바르르 떨 뿐이다

     -전문-

 

    ----------

    돌의 말

 

 

  손은 돌을 던져 말을 한다

  튼튼한 어깨를 지나온 말

  이것은 사나운 짐승과의 소통

  뒤따라오는 말과

  돌아보는 말들의 통역

 

  돌을 손에 쥐는 순간

  손은 돌의 모서리를 찾는다

 

  그곳은 돌의 입, 한 줌에게 묻는다

  무슨 말을 했던 거야

  어쩌다 꽉 다문 말이 된 거야

  날아가, 저리로 가

 

  날아간 속도만큼 이빨이 돋는

  돌의 비행법은 직선이다

 

  돌은 궤적을 그리며

  한동안, 어쩌면 평생 침묵에 든다

  말할 수 없을 때

  돌을 던져 말하라는 말

 

  오욕은 날아다니는 말이다

  나는 돌의 말에 맞아 본 적 있다

  큰 돌은 무거워 그곳에 두고 맞았고

  작은 돌들은 날아다녀서 막을 수가 없었다

 

  돌을 던져 길을 열 때

  맞춤한 궤적을 찾을 때

  내 몸이 돌탑이거나

  돌탑을 쌓는 일이 허다하다

  아슬아슬한 오욕

  와르르 허물면 아무것도 없다

 

  이제 나는 날 선 돌을 외면하려 한다

  돌을 찾는 속도로 도망치려 한다

  말을 섞어 돌탑 하나 쌓을 관계란

  피 묻은 말 혹은 긴 침묵이라는 것

 

  함부로 던지 말을 뒤지는 풀숲

  그새 여린 풀들이 돋아나는 돌의 입

     -전문-

 

  -----------------------

  * 시집 『지나간 월요일쯤의 날씨입니다』에서/ 2021. 11. 9. <여우난골> 펴냄

  * 안은숙/ 서울 출생, 2015년『실천문학』으로 시 부문 & 2017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수필 부문 당선되어 등단

'시집에서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파 꽃 외 1편/ 윤명규  (0) 2021.12.23
허물의 온기/ 윤명규  (0) 2021.12.23
난파선/ 안은숙  (0) 2021.12.22
어느 별의 유서 외 1편/ 홍미자  (0) 2021.12.21
별다방 1호점/ 홍미자  (0) 2021.1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