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별의 유서 외 1편
홍미자
강원도 삼척군 원덕읍 원덕면 임원리, 엄마의 눈물을 받아 적었네 엄마는 무학이었고 나는 국민학생이었으므로 두고 온 안부를 묻거나 타관살이 묵은 설움을 쏟아 내거나 한 글자 한 글자 나는 엄마의 심장이 되었지
오래된 꿈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화전을 일구다 허리를 펴던 나무 그루터기 엄마의 등을 비비는 햇빛이었을 때, 인민군에 징집된 남편을 기다리는 장독대 물 한 그릇 침묵을 흔들어 깨우는 바람이었을 때, 한숨과 넋두리 사이 흩어지는 혼잣말 같았지
대필의 습성은 내 남루한 유산이 되었네 퀭한 저녁을 끌며 가는 해진 신발들과 길 건너 깜박이는 점멸등의 비명과 무시로 차가운 강물로 투신하는 어느 별의 유서까지 나는 받아 적었지 밤마다 떠돌다 엉킨 무수한 말들을 해독하며
-전문/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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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스캔하다
창밖에 나무들이 턱턱 베어졌어요
다시 봄이 왔냐고 흐린 눈으로 당신이 물었죠
뿌리 뽑힌 채 땅속에 묻힌 겨울 무처럼
침대 안에서 시들어 가는 가늘고 긴 손가락들
창가 화분이 붉은 꽃을 피워 올렸죠
가지런히 빗질해야 할 기억은 자라지 않아
마른풀 냄새 날리는 머리카락들
봄은 오지 않을 거라고, 울렁이는 말을 삼켰죠
꽃이 피었다는 말은 쓸쓸합니다
지나온 모든 길이 지워지는 순간이므로
흰 트럭에 실려 떠나는 나무토막들은
어느 야산에 버려져 풀풀 삭아 가겠죠
당신은 이미 알고 있을까요, 다시 오는 건 없다고
천 개의 봄을 우린 지나쳐 갈 뿐이라고
유리의 벽을 뚫고 온 햇살이 당신을 훑고 지나갑니다
무언가를 살피려는 듯 천천히, 날카롭게
-전문/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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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혼잣말이 저 혼자』에서 / 2021. 9. 10. <파란> 펴냄
* 홍미자/ 1960년 충남 대전 출생, 2018년『내일을 여는작가』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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