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그림자가 없다
김수영(1921-1968, 47세)
우리들의 적은 늠름하지 않다
우리들의 적은 커크 더글러스나 리처드 위드마크 모양으로 사나웁지도 않다
그들은 조금도 사나운 악한이 아니다
그들은 선량하기까지도 하다
그들은 민주주의를 가장하고
자기들이 양민이라고도 하고
자기들이 선량이라고도 하고
자기들이 회사원이라고도 하고
전차를 타고 자동차를 타고
요릿집엘 들어가고
술을 마시고 웃고 잡담하고
동정하고 진지한 얼굴을 하고
바쁘다고 서두르면서 일도 하고
원고도 쓰고 치부도 하고
시골에도 있고 해변가에도 있고
서울에도 있고 산보도 하고
영화관에도 가고
애교도 있다
그들은 말하자면 우리들의 곁에 있다
우리들의 전선戰線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들의 싸움을 이다지도 어려운 것으로 만든다
우리들의 전선은 된케르크도 노르망디도 연회고지도 아니다
우리들의 전선은 지도책 속에는 없다
그것은 우리들의 집안 안인 경우도 있고
우리들의 직장인 경우도 있고
우리들의 동리인 경우도 있지만·······
보이지는 않는다
우리들의 싸움의 모습은 초토작전이나
「건 힐의 혈투」 모양으로 활발하지도 않고 보기 좋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언제나 싸우고 있다
아침에도 낮에도 밤에도 밥을 먹을 때에도
거리를 걸을 때도 환담을 할 때도
장사를 할 때도 토목공사를 할 때도
여행을 할 때도 울 때도 웃을 때도
풋나물을 먹을 때도
시장에 가서 비린 생선 냄새를 맡을 때도
배가 부를 때도 목이 마를 때도
연애를 할 때도 졸음이 올 때도 꿈속에서도
깨어나서도 또 깨어나서도 또 깨어나서도·······
수업을 할 때도 퇴근 시에도
사이렌 소리에 시계를 맞출 때도 구두를 닦을 때도·······
우리들의 싸움은 쉬지 않는다
우리들의 싸움은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차 있다
민주주의의 싸움이니까 싸우는 방법도 민주주의식으로 싸워야 한다
하늘에 그림자가 없듯이 민주주의의 싸움에도 그림자가 없다
하······· 그림자가 없다
하······· 그렇다
하··· 그렇지·······
아암 그렇구 말구······· 그렇지 그래
응응······· 응······· 뭐?
아 그래······· 그래 그래.
-전문-
▶1960년 4월 3일: 혁명적 감응과 군중적 감염력- 김수영의 시와 황현산의 산문(발췌)_ 이찬/ 문학평론가
그렇다. 역시 김수영이다. 2020년대 초입을 지나고 있는 지금 여기에서도 김수영은 반드시 소환되어야 할, 아니 우리 앞에 매번 다시 나타날 수밖에 없을 불멸의 기념비이자 시뮬라크르(simulacre)의 유령인 까닭이다. 이는 또한 그의 문헌들 마디마디에 현대 한국시가 자신의 위대한 유산들로 간직하고 계승해야 할 (탈)현대적 사유의 첨단과 그 예술적 방법론의 휘황한 정수가 일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2018년 다시 개정되어 출간된 『김수영 전집』에 따르면, 「하······· 그림자가 없다」는 4.19 혁명이 일어나기 바로 직전, 1960년 4월 3일 완성된 작품이다. 제목에서 어렴풋이 직감할 수 있듯, 이 시편은 '그림자'라는 가상의 이미지를 예술적 짜임새의 중핵으로 삼으면서, '민주주의'로 표상되는 당대 사회 · 정치적 감성의 흐름과 배치, 즉 혁명적 정동의 발생과 군중적 감염력의 확산을 예감하고 있는 첨단의 문제틀을 휘감고 있다. 1)
1960년 4월 3일. 그 날짜의 어느 한순간 김수영을 섬광처럼 꿰뚫고 지나갔을 예지적 통찰이 '그림자' 이미지와 말줄임표의 기호들에 격렬한 침묵처럼 응집되어 있다. 따라서 '그림자'는 4.19 혁명에서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져 나간 '민주주의'로 일컬어지는 감성적 동요와 그 공명의 폭발력을 미리 앞질러 직관하는, 전미래 시제의 역설(le paradoxe du future anterieur)을 휘감고 있는 하나의 단자(monad)이다. 또한 김수영의 시적 사유의 첨단점, 그야말로 전위적인 이미지 조형술과 예술적 짜임새의 극점을 집약하고 있는 사유 이미지일 것이 분명하다. (p. 시 37-39/ 론 39-40)
1) 이찬, 「김수영 시와 산문에 나타난 시뮬라크르의 정치학」『한민족문화연구』40집, 한민족문학회,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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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찬 세 번째 평론집 『감응의 빛살』에서/ 2021. 10. 1. <파란> 펴냄
* 이찬/ 1970년 충북 진천 출생, 2007년《서울신문》신춘문예로 문학평론 부문 등단, 저서『현대 한국문학의 지도와 성좌들』『20세기 후반 한국 현대시론의 계보』『김동리 문학의 반근대주의』, 문학평론집『헤르메스의 문장들』『시/몸의 향연』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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