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집 속의 시

신상조_문학평론집『붉은 화행』(발췌)/ 꿈 : 박태현

검지 정숙자 2021. 6. 20. 03:22

 

   

 

    박태현

 

 

  농사꾼이라 그런지 꿈을 꾸어도 그놈의 숨찬 농사다 모를 내기 위해 낡은 트럭에 쟁기를 채워 저녁 늦게까지 논을 갈고 있는데 갑자기 트랙터가 둥근 걸음을 멈춰서는 바람에 살펴보니 심장이 멎어버렸다 근래 몇 년 동안 덜덜거리는 몸으로 크고 작은 질환을 겪어냈으나 그때마다 임시 처방으로 부러진 다리도 금 간 척추도 깁스해가며 세월의 자락을 함께 넘어왔는데 녹슨 바람이 그를 죽게 한 나도 함께 따라가야 한다며 끌고 들어갔다 한참 끌려가다 생각해보니 트랙터는 고철값이라도 지니고 떠난다지만 내 몸뚱이는 이제 폐기물 처리비용까지를 물어야 하는 처지, 여태 나는 트랙터에 후진 기어가 있는 줄도 몰랐다 전진 기어만으로 내 삶의 자락을 불개미처럼 넘겨왔다. 그러나 일손이 없어 애태우는 이웃의 눈물 젖은 자락 한 번 넘겨준 기억이 없으니 곧 용광로에 던져져 살과 뼈가 다 녹아내린다 해도 어느 정든 이웃이 있어 손길 한 번 잡아주겠는가 그래도 잊지 못해 이승의 논밭을 돌아보다가 그만 불길에 데여 눈을 떴을 때, 북창 너머 칠월의 장맛비를 맞고 있는 새벽 느티나무가 유난히도 푸르게 보였다

    -전문(p..323)

  

  부메랑의 시학 -박태현부메랑(발췌)_신상조/ 문학평론가

  여기 농사일에 삶을 정착시친 시인이 있다. 박태현 시인이다. 1996년 '농민신문사 생활수기 공모'에 응모한 그의 아내가 당선작의 영광을 안을 자신의 글에서 "(남편과 함께) 물려받은 유산이라곤 시골 오두막 한 채와 하답 600평이 전부였다. (···) 언제쯤이면 이 농사일을 그만하고 살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쫓기듯 하루하루를 살아왔다"고 고백했듯이, 그는 가난한 농사꾼의 자식으로 태어나 일평생을 농사꾼으로 힘겹게 살아왔다. 독학으로 국가고시 1차에 합격하여 온 동네를 떠들썩하게 했던 그가 부모상을 차례로 치르고 난 후 다섯이나 되는 동생들 생계를 책임지느라 공부를 포기하고 농사를 지으며 살았으니, 개인적 원과 삶의 어긋남을 경험한 한스러움이 결코 작지는 않았으리라. 더군다나 어릴 떄 소아마비를 앓아 한쪽 다리를 저는 신체적 결함을 가지고 있는 그이고 보면, 농사일로 말미암은 고단함도 남들보다 훨씬 컸으리라 여겨진다. (p.321)

 

  농사일에 몸과 마음이 묶여버린 부지런한 촌사람답게, 화자는 꿈에서까지 "낡은 트랙터에 쟁기를 채워 저녁 늦게까지 논을 갈고 있"다. 그런데 그동안 크고 작은 고장이 잦던 트랙터가 완전히 숨을 멎어버린 사고가 발생했다. 1960년, 우리나라에 왔던 펄 벅이 볏단을 싣고 가는 소달구지 옆에서 농부가 지게에 볏단을 지고 가는 모습을 보고 "소의 짐을 덜어주려는 마음"이라고 감탄했다지만, 그것은 자신보다 소를 중시해야 했던 농사꾼의 절실함을 미처 헤아리지 못한 시선이다. 어쨌거나 일손이 부족한 농촌에서, 예전의 소에 비견될 트랙터는 그동안 제 몫 이상을 단단히 해온 모양이다. 화자는 이 트랙터와 더불어 "세월의 자락을 함께 넘어"왔다고 고백한다. 기계도 곁에 두고 오래 사용하다 보면 말없이 성실한 하인처럼 정이 들게 마련이다. 트랙터가 화자의 무의식 속에서 농사일을 돕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동반자적 가치를 지님도 무리는 아니다. 화자는 용도가 사라지면 무거운 쇳덩어리에 불과한 이 사물을 "그"라고 부른다. '그것'은 사물을 부르는 이름이지만, '그'는 사물을 인간과 동등하게 부르는 이름이지 않은가. 때문에 '그것'이 아닌 "그"는 '모터'가 멈추지 않고 "심장이 멎어버"린 게 된다. 화자에게 트랙터는 사물의 쓰임이 다한 게 아닌 존중받아 마땅한 생명체로서 죽음을 맞은 것이다.

  이제 화자는 낡아 폐기처분을 앞둔 트랙터의 운명에서 급기야 노역勞役을 견디며 하루하루 살아온 자신과 자신의 인생을 본다. "여태 나는 트랙터에 후진 기어가 있는 줄도 몰랐다 전진 기어만으로 내 삶의 자락을 불개미처럼 넘겨왔다"라는 진술에서 보다시피, "임시 처방으로 부러진 다리도 금 간 척추도 깁스해가며" 버티어온 트랙터의 사투는 "쟁기날이 부러"지고 "보습이 부러"(「밭을 갈다가」)"지도록 흙과 씨름해온 화자의 삶과 나란히 겹친다. 멈춰버린 트랙터는 화자 앞에 던져진 한계상황이자 그가 걸어온 삶의 궤적을 환기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녹슨 바람이 그를 죽게 한 나도 함께 따라가야 한다며 끌고 들어갔다"는 꿈의 내용은, 고되고 부담스러운 삶이 힘에 부쳐 '나도 그만 따라 죽고 싶다'는 화자의 신음소리로 들려 가슴이 먹먹해지는 대목이다. (p.324-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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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상조_문학평론집 『붉은 화행』에서/ 2021. 5. 29. <상상인> 펴냄

  * 신상조/ 2011년 ⟪중앙일보⟫ 신인문학사 평론 부문 등단, 계명대학교 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