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나븨
정지용
畵具를 메고 山을 疊疊 들어간 후 이내 蹤迹이 杳然하다 단풍이 이울고 峰마다 찡그리고 눈이 날고 嶺 우에 賣店은 덧문 속문이 닫히고 三冬내 열리지 않었다 해를 넘어 봄이 짙도록 눈이 차마와 키가 같었다 大幅 캔바스 우에는 木花송이 같은 한 떨기 지난해 흰 구름이 새로 미끄러지고 瀑布 소리 차츰 불고 푸른 하눌 되돌아서 오건만 구두와 안ㅅ신이 나란히 노힌 채 戀愛가 비린내를 풍기기 시작했다 그날 밤 집집 들창마다 夕刊에 비린내가 끼치였다 搏多 胎生 수수한 寡婦 흰 얼골이사 淮陽 高城 사람들끼리에도 익었건만 賣店 바깥 主人된 화가는 이름조차 없고 松花가루 노랗고 뻑 뻑국 고비 고사리 고부라지고 호랑나븨 쌍을 지여 훨훨 靑山을 넘고.
-전문-
▶ 사랑, 만남의 우연과 지속의 구축- 정지용 시 「호랑나븨」(발췌)_ 이찬/ 문학평론가
1.
「호랑나븨」는 전통 지향적 딜레탕티즘(dilettantism)과 반反근대주의의 세계관을 자기 운동의 좌표로 설정하며, 식민지 말기에 새롭게 등장한 문예지 『문장』 1941년 1월호에 수록된다. 이 시편은 정지용이 한국 현대시의 거장일 수밖에 없는 이유와 근거를 가장 명징하게 예증하는 텍스트로 기억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문학사적 맥락은 텍스트 마디마디에 응집된 다양한 양면가치(ambivalence)의 진폭들을 통해 생성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유발하는 예술적 사유와 상상력은 현대적 경험의 테두리를 멀찌감치 넘어선 자리에서 휘날려 오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 「호랑나븨」의 상반된 두 얼굴은 첫 문장 "畵具를 메고 山을 疊疊 들어간 후 이내 蹤迹이 杳然하다"에서부터 암시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 문장을 말하고 있는 화자를 우선 떠올려 보라. 그는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바깥에다 풀어놓는 일인칭 주인공 시점의 화자가 아니다. 도리어 첫 문장의 주인공 "화가"를 시의 표면에 등장시킴과 동시에 사라지게 만드는 일종의 예술적 장치다. 이 시편 전체의 심미적 느낌을 조율하는 매개자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시편이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자신의 굴곡진 마음결과 이야기들을 밖으로 펼쳐 놓는, 이른바 서정으로 지칭되는 문학 갈래의 한 테두리로 귀속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호랑나븨」의 삼인칭 관찰자 시점에 근접한 서술 형태는 매우 특출한 사례를 이룰 것이 자명하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화가"와 "寡婦"는 우선 낭만주의 예술의 핵을 이루는 로맨틱 아이러니(romantic irony)를 구현하고 실천한 인물들로 해석할 수 있을 듯하다. 이들은 작품 내부에서 "비린내"로 표상되는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극한이 어떻게 서로를 가로질러 하나로 융합될 수밖에 없는지를, 제 이미지들의 행간에 감춰진 침묵의 말을 통해 암시하기 때문이다. 아니, 저 인물들은 이른바 낭만적 사랑이란 말로 일컬어져 온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예기치 않은 만남, 알랭 바디우가 '사랑의 융합적 관념(Ia conception fusionnelle I'amour)'이란 말로 호명했던 어떤 황홀경의 상태에 다다른 것이 틀림없기에.1)
이처럼 황홀한 하나-됨을 추구하는 사랑이란 곧 다수를 제거함으로써 둘 너머에 있는 상태를 설정하는 사랑으로 정의될 수 있을 듯하다.2) 아니, 낭만적 열정으로 넘쳐흐르는 사랑은 예기치 않은 만남으로 생겨나는 황홀경 상태로 그 모든 것을 소진해 버릴 것이 분명하다. 그리하여, 바디우가 말하듯 "마술적인 외재성의 한순간을 맞이하여 불타 버리고, 소진되며, 동시에 소비되"는 사랑이 생성된다고 하겠다. 달리 말해, "기적적인 것, 완전히 녹아버린 어떤 하나의 만남이 도래"3)하게 된다는 것이다. (p. 시 745-746/ 론 746-747)
1) A. Badiou, Conditions, Seuil, Paris, 1992, pp.255-256.
2) 양운덕, 『사랑의 인문학 - 사랑의 문학 사랑의 철학』, 삼인, 2015, p.291.
3) dkffod qkeldn, 『사랑예찬』, 조재룡 역, 길, 2010,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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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찬 세 번째 평론집 『감응의 빛살』에서/ 2021. 10. 1. <파란> 펴냄
* 이찬/ 1970년 충북 진천 출생, 2007년《서울신문》신춘문예로 문학평론 부문 등단, 저서『현대 한국문학의 지도와 성좌들』『20세기 후반 한국 현대시론의 계보』『김동리 문학의 반근대주의』, 문학평론집『헤르메스의 문장들』『시/몸의 향연』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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