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소화꽃을 줍는 어머니
이금미 / 수필가
장마가 지속 중인데 모처럼 하늘이 높고 공기가 맑다. 서울에 사는 지인이 제주에 일이 있다고 하기에 공항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여름철이라 수국을 비롯한 다양한 꽃들이 여기저기 피어있다. 그중에 유난히 마음이 가는 능소화의 자태가 마음을 설레게 한다.
공항으로 들어서는 길가에는 능소화가 울타리를 휘감아 피어있고, 야자나무에는 꼭대기를 향해 한 송이씩 꽃을 피우면서 마음을 달래고 있는지 다소곳한 능소화의 자태가 임을 그리는 여인의 자태와도 사뭇 비슷하다.
공항을 다녀오는 길에 보았던 능소화가 마음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능소화꽃을 좋아해서 예전에는 그림의 화폭에 담은 적도 있지만, 능소화를 보면 시어머님이 떠오르게 된다.
얼마 전에 시댁에 다녀온 일이 있다. 그곳은 바다가 인접해 있고 산방산이 보이는, 마당의 울타리는 돌담으로 둘러있다. 구멍이 숭숭 나있는 돌담 안과 밖에는 주황색 능소화가 흐드러지게 땅을 향해 내리면서 피어있어 오가는 행인들이 발길을 멈추게 한다. 그 앞에서 꽃의 여신인 양 사진을 찍고 가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능소화를 사전에 찾아보니 '금등화金藤花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쌍떡잎식물 목 능소화과의 덩굴식물이라고 한다. 옛날에는 능소화를 양반집 마당에만 심을 수 있어 '양반꽃'이라 불렀다고 한다. 능소화가 흐드러지게 피면 장마가 깊었다는 신호라서 어른들은 장마가 끝난 후에 파종할 농사를 준비하기도 하였다는 말을 주위의 어른들께 들었다.
어머님은 일과의 대부분을 복지관에서 지내셨는데 코로나19로 인하여 외출이 제한되었다. 시댁에 가면 습관처럼 과수원을 둘러보는데 과수원의 한편에는 능소화꽃 송이가 소복하게 쌓여 있어서 꽃송이 무덤처럼 보였다. 어떻게 꽃무덤이 되었을까 궁금했었는데 궁금증이 풀렸다. 집 주위를 산책하는 동안 능소화꽃 송이가 떨어졌는데 어머니는 익숙한 몸놀림으로 꽃송이를 손부리고 집고 마당을 거쳐 과수원의 한편에 쌓여 있는 꽃무덤으로 걸음을 옮기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걸음을 했으면 저리도 많은 꽃송이가 무덤이 되었늘까.
꽃송이 무덤에 대한 해석이 떠오르지 않아서 어머니에게 여쭤보았다. 어머니는 생각의 여지도 없이 "저 꽃송이들은 내가 옮겼노라."라고 하신다. 왜소한 몸매에 약간 굽어진 허리와 미소 머금은 얼굴에는 세월을 알려주듯 검버섯이 피어있다. 복지관에 나가지 못하는 동안 어머니는 울타리 밖에서 행인들을 보면서 일과를 보내시다가 꽃이 한 송이 뚝! 떨어지면 떨어질 때마다 꽃의 숫자에 맞추어 마당을 건너 꽃송이 무덤으로 향한다.
손부리로 꽃을 든 어머니의 마음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한 송이씩 옮겨서 쌓여가는 꽃무덤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마음은 또 어떤 마음이었을까. 울타리 담장 밖에 떨어진 꽃송이를 손부리로 집으며 어머니는 누군가의 걸음걸이가 안녕하기를 바라는 기도를 하였을까. 어머니는 꽃을 줍는 순간마다 당신이 살아온 세월을 반추하는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능소화꽃 송이보다 더 아름다운 10대의 소녀가 꽃가마를 타고 혼인하여 이제 백수白壽가 되었다.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은 아무런 욕심도 없고 모두의 안녕을 바라는 꽃보다 아름다운 마음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옆에 계셨으면 시어머니를 꼭 안아드리고 싶은 마음이다. 능소화꽃보다 더 아름다운 나의 어머니를. (p. 341-3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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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청춘』 2021-가을(49)호 <수필> 에서
* 이금미/ 1961년 제주 출생, 1994년『문예연구』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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