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집 속의 시

이현승_『얼굴의 탄생』(발췌)/ 문둥이 : 서정주

검지 정숙자 2021. 5. 27. 17:04

 

    문둥이

 

    서정주(1915-2000, 85세)

 

 

  해와 하늘 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우름을 밤새 우렀다

      -전문-

 

  서정주 시의 미학적 화자-『화사집』을 중심으로(발췌)_이현승/ 시인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미학적 태도로 인해 사물의 총체성이 탈락되는 것은 문둥이라는 작품을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이 작품도 한센병에 걸린 사람의 절망을 세목보다는 그러한 병을 운명으로 받아들인 사람의 체념적인 내면을 미학적으로 승화하는 데 노력이 집중되고 있다. 그 단초는 저 자유간접화법의 방법론에서 드러난다. 1연의 '해와 하늘빛이 서럽다'는 문둥이의 느낌은 화자가 문둥이에게 기투한 결과이다. 화자의 문둥이에 대한 투사와 동일시는 2연과 3연의 주어를 생략해도 불편하지 않다. 문둥이가 아이를 잡아먹는다거나 하는 것은 세간에 떠도는 꾸며진 이야기로, 한센병이 나균에 의한 질병이라기보다는 하늘에 의해 저주받은, 벌 받은 삶이라는 상징을 드러내는 데 요긴하다. 그러므로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종의 아들로 태어난 「자화상」의 화자처럼, 문둥이」가 꽃처럼 붉은 울음을 운다는 표현에 가미된 미학적 태도는 오히려 광적이라고 할 만큼 아름다움의 추구에 충실하다.

  5행 밖에 되지 않는 시를 통해 각각 해와 하늘빛을 서러워하는 문둥이의 이미지를 저주받은 숙명, 그리고 살기 위해서 아이를 먹는 기행, 그리고 문둥이의 외양이 주는 섬뜩한 이미지를 결합시켜 그 충격적인 이미지를 온통 인간 숙명의 보편적 설움으로 바꾸어 내려고 한다. 살아도 이미 죽은 삶을 견디는 인간의 원통함을 '붉은 울음'으로 제시한다. 문둥이」의 '붉은 울음'은 저 「자화상」의 '핏빛 이슬'에 대응한다. 말하자면『화사집』에 있는 모든 절망들은 얼마간 현실의 저주와 절망들을 극대화하기 위해 미학적으로 고려한 상상력들인 셈이다. 그 극대화는 무엇보다 화자의 설정을 통해 저주를 받아들인 화자에 의해 발아되며 그 감정들을 폭발시킨다. 그런데 이렇게 편향되고 과장된 화자 앞에는 마찬가지로 축소되고 편향된 역할을 담당하는 대상이 마주 놓인다. 『화사집』에 등장하는 여성은 주로 에로스적인 육체 이미지로 등장하고, 앞에서 언급한 문둥이도 서러움의 화신으로만 나타난다. 그런데도 이 세계의 주체들은 하나같이 열에 들뜬 정념의 분출을 경험하고 있으니 「봄」과 같은 작품에서는 "아무병도 없으면 가시내야. 슬픈일좀, 슬픈일좀, 있어야겠다"고 고백한다. 서정주 자신의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기도 한 「벽」의 저 통곡은 어떤가. 막히고 정지하고 죽은 '벽'에서 시인은 '벙어리의 통곡(목메어 울음)'을 볼 만큼 기저 감정의 온도가 높다.(p. 시 75/ 론 7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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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현승_한국 현대시의 화자 연구『얼굴의 탄생』에서/ 2020. 12. 30. <파란> 펴냄

  * 이현승/ 1973년 전남 광양 출생, 고려대학교에서『1930년대 후반기 한국시의 언술 구조 연구  백석 · 이용악 · 오장환을 중심으로 』로 박사학위 받음, 한경대, 경희대, 광운대, 중앙대, 고려대학교에서 강의했으며, 고려대학교 BK21 한국어문학 교육연구단, 민족문화연구원의 연구교수를 거쳐, 현재 가천대학교 리버럴아츠칼리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