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착한 사람이 아니다
박판식
여자는 나무 꼬치로 은행 알을 꿰고 있다
과도로 한 남자가 다른 남자의 아랫배를 찔렀다는 기사가 거실바닥에
깔려 있는 평범한 가정집이다
앞자리의 급우를 지독하게도 괴롭혔던 H가 생각나는 아침이다
2년제 대학에 들어갔다가
지금은 양계장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그가 무슨 어마어마한 일을 저지를 줄 알았다
어둠의 세계의 피도 눈물도 없는 보스가 될 줄 알았다
오늘 나는 흑인 혼혈아가 되어 있는 꿈을 꾸었다
백인이 너무 되고 싶어서 한참을 울었다
분하고 억울해서 나를 이렇게 만든 누군가에게 복수하고 싶었다
바람이 분다 고개를 숙이고 걸어가라
이런 날은 하늘을 쳐다보지 마라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울고 있다
파란 하늘이, 눈물마저 마른 사람이 울고 있다
너는 보겠지, 옥상의 포대기 속에서
땅속에 ㄷ자로 세워진 정화조 속에서
혼자 방치된 안방에서
일신대교 아래에서
장기말에 치여 세상 밖으로 떨어진
어떤 방심한 파란색의 장기말을
생활은 어떻게 그 안에 불안과 외로움을 품고 있는가
오늘은 까마귀들이 옥상 텃밭의 상추 씨앗을 다 파먹었다
나는 자동차와 오토바이들이 마차와 말로 보인다
나도 안다, 내가 중세인이라는 것을
하지만 세상이 이미 악의 손에 떨어져 있다면
이런 식으로 굴러갈 리도 없을 테지
그 정도는 어리석은 나도 짐작하고 있다
세상에 신을 배신할 용기를 지닌 자가 어디에 있으랴
신을 모르기 때문에 겁 없이 그렇게 하는 것일 뿐
뭔가가 지금 나를 알뜰살뜰 꿰고 있다
티브이는 현재 발리에서 생긴 일을 재방송 중이다
진지하게 그것을 보고 있으면
괴롭고 슬퍼서 채널을 돌리게 된다
드라마는 되도록 더 화황되며 상투적이고 과장되게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마음에 담아주지 말고 날마다 잊어버려야 한다
뭔가 좋은 것이 그 안에 약간을 담겨 있었다 해도
-전문, 『현대시』 2021-4월호
▶ 믿음으로 살기(발췌) _김정빈/ 문학평론가
화자는 "흑인 혼혈아가 되어 있는 꿈"을 꾸고 "백인이 너무 되고 싶어서", "분하고 억울하여"하여 "한참을 울었다"고 고백한다. 자신이 겪는 차별에 대해, 그 차별이 잘못되었다는 믿음을 가지기보다 오히려 차별 논리에 편승하는 태도다. 그 논리에 기반해서 "누군가에게 복수하고 싶"다는 마음까지 품게 된다.
사람이 가장 폭력적으로 변하는 때는 비겁하게도 폭력을 당했을 때다. 자신이 나약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싫어서, 또는 부당함을 겪었다는 사실이 일종의 면죄부 같아서 폭력적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폭력은 복수와 만나면 절대 끊이지 않는다. 여기까지는 모두가 알고 있는 내용이니, 차별 논리에 저항하고 폭력을 멈춰야 할 텐데, 그럴만한 용기와 수용력이 부족하다. 그만큼의 선善이 화자에게는 없다.
그런데 이 면죄부에 있어서, 내가 지닌 면죄부가 얼마만큼의 죄를 면해줄 수 있는가는 순전히 자신이 정하는 것이다. 면죄부를 받은 셈 치고 맘 편히 복수를 휘두르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 그 차이는 여러 지점에서 생기겠지만, 화자는 신을 꼽는다. 그는 "신을 배신할 용기를 지닌 자"는 없다고 말한다. "신을 모르기 때문에 겁 없이 그렇게 하는 것일 뿐"이라고. 더불어 그는 스스로를 "중세인"으로 인식한다. 중세인은 신을 믿을 수밖에 없는, 믿도록 교육받은 존재다. 그는 일상에 패배한 폭력과 저버린 오랜 믿음을 두고 혼란스러워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오랜 믿음, 신神을 배신할 수 없음을 인지한다.
그래서 화자는 폭력에 대응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숙이고" 외면할 뿐이다. "허황되고 상투적이고 과장"된 드라마를 보며 감정을 해소한다. 그리고 날마다 잊어버린다. 이것이 그가 믿는 신神이자 그가 "불안과 외로움을 품고 있는" 생활을 견뎌내는 방식이다. (p. 시 277-279/ 론 286-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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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시』 2021-5월(377)호 <현대시작품상 이달의 추천작/ 을 읽고> 에서
* 김정빈/ 문학평론가, 2020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로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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