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주 시인의 아스라한 에스프리, 그 살가운 정
이경철/ 시인, 문학평론가
문학행사를 시작하기 전 의례로 작고 문인에 대한 묵념이 이어진다. 근래 한 행사에서 묵념을 마친 다음 주위의 선배들께 묵념 때 누굴 먼저 떠올리느냐 여쭸더니 대부분 미당 서정주 시인이란다. 왜? 육친 같은, 살가운 정 때문에. 나 역시 그렇다.
고교 시절 미당을 처음 뵈었다. 1974년 가을 경복고등학교 <문학의 밤>에 초대돼 강평을 마친 미당은 "시를 좋아하고 잘 쓰니, 학생한테 꼭 보여줄 데가 있다"며 인근 보안여관으로 데려갔다. "여기서 한동안 함형수하고 같이 살다시피 하며 『시인부락』이란 잡지를 냈지. 근사하게 말이야. <시인부락사>란 간판까지 내걸었는데······"라며 말문을 잇지 못하고 입만 쩝쩝 다시셨다.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된 해 가을 「해바라기의 비명碑銘」이란 절창을 남기고 요절한 함형수 시인과 함께 동인지 『시인부락』을 펴낸 문학사의 현장을 내 손을 잡고 가 보여준 것이다. 지금 보안여관은 그런 역사를 소중히 간직하며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해 시민들의 발길을 끌고 있다.
대입면접시험 시험관으로 앉아 있던 미당이 반색하며 "일류고 출신인 학생이 이 이차 대학엔 왜 오셨는가" 하고 물었다. "선생님께 시 배우러 왔지요"라고 답했다. 그 단 한 마디씩의 문답으로 면접을 통과하고 들어간 대학 1학년 미당의 현대시 수업시간. 강단이 아니라 환한 봄 햇살이 들어오는 창가에 기대어서 미당은 샤를 보들레르며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과 에스프리에 대해 우리 옛날 이야기하듯 들려줬다.
그러면서 "이런 날은 좋은 햇살 속에서 막걸리나 한잔하는 게 정말 공부인데······"라는 말을 자주했다. 정말이지 미당한테서는 무슨 학술적인 그 무엇보담 시인으로서의 그 뭐시기를 배운 것 같다. 의미 있는 것보단 피부에 직접 와 닿는 살가운 그 무엇, 그러면서도 '에스프리'란 음상처럼 아스라이 풀어지는 그 무엇을 느낀 것 같다.
"시인이란 똑같은 소리 되풀이하지 말고 계속 새로운 세계를 찾아나서야 되는 것이야. 기웃기웃거리며 남의 것 좋다 흉내내지 말고 무엇에도 흔들림 없는 '절대적 자아'를 가지고 끝없이 떠돌라는 것이지. 아직 덜 되어서 무엇인가 더 되려고 떠도는 것이 시이고 우리네 삶 아니겠는가"
2000년 10월 10일 해로偕老하던 아내와 사별한 미당은 그만 숟가락을 놓아버렸다. 그런 미당을 사당동 댁 봉산산방蓬蒜山房으로 찾아뵙고 시와 우리네 삶에 대해 마지막으로 들은 이야기다. 그리고 며칠 후 병원으로 옮겼다.
"이 부장 오셨는가?"
"아직 부장은 못 됐고 차장인 걸 선생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곧 될 텐데 내가 조금 먼저 부르면 안 되겠남. 그래 이만하면 나도 시인이랄 수 있겠는가?"
"그럼요. 이 하늘 아래 최고의 시인이 선생님이신걸요"
산소마스크를 쓰기 작전 미당과 나눈 마지막 대화다. 며칠 후인 2000년 12월 24일 밤 11시 조금 넘겨 미당은 숨결을 놓아버렸다. 기다렸다는 듯 눈발이 날리지 시작하며 세상은 오랜만에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맞았다. 목숨이 꺼지는 순간까지도 덕담을 보내는 신선이며 무당인 미당의 그 넉넉한 여유와 정 덕분이었던가. 그해 연말 인사에서 나는 정말 부장으로 승진했다.
유품을 정리하던 중 1950년 봄부터 1999년까지 반백 년 이르도록 써온, 대학노트 1천5백 쪽 분량의 <작시作詩 공책> 10권이 나왔다. 첫 권에서부터 「무등을 보며」 등 널리 알려진 시들이 반듯한 육필로. 혹은 줄 그어버려 지우고 고치고 첨가한 부분들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쓰고 고치고 또 고치고 하다 영 마음에 안 들면 페이지 전체에 가위표를 그어버린 시들도 많다. 여백 곳곳에 단상을 기록해 놓아 그런 것들이 어떻게 시가 되어 가는지를 추적할 수 있는 미당 시 창작 현장이 그 공책이었던 것이다. 말년 기력이 다해가는 떨림까지 살갑게 전해지는 그 진짜 육필 시편들을 보고 나는 여직도 미당에게 시를 배우고 있다. ▩
-----------------------
* 『문학의 집 · 서울』 2021-2월(232)호 <내 마음에 머문 사람-67>
'에세이 한 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존재의 순간들/ 이태동 (0) | 2021.04.28 |
---|---|
길나무의 털목도리/ 윤효 (0) | 2021.04.24 |
예술과 정신/ 김아타(사진작가) (0) | 2021.03.05 |
아기 뱀 한 마리/ 류세진 (0) | 2021.02.26 |
1998년, 내 일기장 속의 며칠/ 정숙자 (0) | 2021.02.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