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의 방
김연숙
그렇게 한참 걸었어 복도인지 회랑인지 어둑하고 지루한 길이었어 불쑥, 푸르스름한 어느 방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천장까지 빼곡한 서랍들의 방이었어 간이 사다리를 딛고 올라 서랍 하나를 열고 나의 것도 벗어 넣었지 배당받은 서랍인지, 임의대로 빈칸 골라 넣은 건지 기억나진 않지만 안내자가 없어도 자연스레 이어지는 프로그램 같았어 서랍을 닫고 사다리를 내려와 그 방을 나오면서 생각하니 오래 사용해온 얼굴을 반납하고 나온 거였어 복도인지 회랑인지 그대로 조금 더 걸어 이번에는 환하게 열려있는 방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커다란 작업대가 있었어 잿빛 축축한 고령토 한 덩이가 둥글게 놓여 있고 이제 그걸 주무르고 치대고 공기 빼고 부드럽게, 최대한 간절하고 다정하게 빚어보는 거였어 영구히 반납하고 아득해진 그 얼굴을 다시 한 번 불러보는 거였어 이 막막한 회고의 방은 두 번째의 방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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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지션』 2021-봄(33)호 <POSITION·1/ 지난 겨울호 '블라인드 시 읽기' 게재 시인/ 자선 대표시> 중에서
* 김연숙/ 2002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눈부신 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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