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견설蝨犬說
이규보(1168-1241, 73세)
어떤 손님이 나에게 와서 말했다.
"어제 저녁에 어떤 불량한 사람이 큰 몽둥이로 개를 때려죽이는 광경을 보았는데, 그 모양이 너무나 비참하여 아픈 마음을 견딜 수가 없었네. 그래서 이제부터는 맹세하거니와 개나 돼지의 고기를 먹지 않을 것이네."
이에 내가 대답했다
"어제 어떤 사람이 이글이글한 불 화로를 끼고서 이를 잡아 태워죽이는 것을 보고 아픈 마음을 참으로 견딜 수가 없었네. 그래서 나는 지금부터 다시는 이를 잡지 않으려고 하네.
손님은 아주 실망한 낯빛을 짓더니 말하였다.
"이는 미물이 아닌가? 내가 큰 것이 죽은 것을 보고 비참한 생각이 들기에 말한 것인데, 그대가 이와 같이 대응하니 나를 놀리는 것인가?"
나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해 주었다.
"무릇 혈기가 있는 것은 사람을 비롯해 소, 말, 양, 곤충, 개미에 이르기까지이고, 살기를 원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것은 다 똑같은 것이네. 어찌 큰 것만 죽음을 싫어하고 작은 것은 그렇지 않겠는가? 그러니 개와 이의 죽음은 똑같네. 그래서 그것을 예로 들어 적절히 대답한 것이지 어찌 그대를 놀리기 위한 말이겠는가? 그대가 내 말을 믿지 못하겠거든 그대의 열 손가락을 깨물어보게나. 엄지손가락만 아프고그 나머지는 아프지 않겠는가? 한 몸에 있는 것은 크거나 작거나, 모든 마디마디를 막론하고 피와 살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아픔이 똑같은 것이네. 더구나 각기 태어난 대로 모양은 다르지만 같은 생명을 받은 것인데, 어찌 저것은 죽음을 싫어하고 이것은 죽음을 좋아할 리 있겠는가? 그대는 물러가서 눈을 감고 조용히 생각해보게나, 그리하여 달팽이 뿔을 쇠뿔과 같이 보고, 메추리를 큰 붕새와 동일하게 보게나. 그런 뒤에야 내가 그대와 더불어 도道를 말할 수 있을 것이네."
-전문 (p. 84)
▶자연친화와 생명존중/ 우리 고전 시가에 나타난 인성과 물성의 조화(발췌) - 임종욱/ 문학평론가
고려시대의 문인 이규보(李奎報 1168-1241, 73세)가 쓴 「슬견설蝨犬說」은 유불도儒佛道 삼교三敎에서 제시했던 생명존중의 무차별성을 아울러 갈파한 대표적인 글이라 할 만하다. (p. 84)
이규보 글쓰기의 특징인 해학성과 풍자성을 걷어내고 읽을 때 이 글에서 우리는 생명의 가치는 '개'와 '이'라는 크기에 좌우되지 않고 생명의 있음 자체가 판단의 기준이라는 대소불이(大小不異, 크고 작은 것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의 사유를 찾을 수 있게 된다. (p. 85)
* 블로그주: 「슬견설」 원문(한문)은 책(각주)에서 일독 要
---------------------
* 『불교문예』 2020-겨울(91)호 <특집 2/ 자연친화와 생명존중>에서
* 임종욱/ 2006년 장편소설 『소정묘 파일』로 등단, 소설 『1780, 열하』 『이상은 왜』 『죽는 자는 누구인가』 등
'고전시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민정_격변기의 시조와...(발췌)/ 이방원 정몽주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缺) 유성원 유응부 왕방연 이색 길재 (0) | 2022.03.31 |
---|---|
정중월(井中月)/ 이규보 (0) | 2021.05.17 |
정재민_한 해의 끝과 시작을...(발췌)/ 수세(守歲) : 허균 (0) | 2021.03.20 |
기칠송(奇七松)/ 설죽 (0) | 2021.03.05 |
새야 새야 파랑새야_대구시 민요 · 53/ 상희구 해제 (0) | 2021.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