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세守歲
허균(1569-1618, 49세)
舊歲隨更盡(구세수경진)
묵은해는 자정과 함께 다하고
新年趁曉來(신년진효래)
새해는 새벽을 좇아 오는구나
光陰眞可惜(광음진가석)
세월이란 참으로 아까워서
客子轉堪哀(객자전감애)
나그네 신세 더욱 슬프다
寶瑟頻移柱(보슬빈이주)
거문고는 자주 기러기발 옮기고
香醪正滃杯(향료정옹배)
향 좋은 술은 잔에 넘실대누나
明朝已三十(명조이삼십)
밝은 아침이면 나이 벌써 서른
衰病兩相催(쇠병랑상최)
쇠약과 질병 둘이 서로서로 재촉하네
-전문-
▶한 해의 끝과 시작을 읊은 시가들(발췌)_정재민/ 육군사관학교 교수
허균(許筠 1569-1618, 49세)의 「수세守歲」라는 제목의 시다. 시적 화자는 지금 이십 대의 마지막 밤을 보내고 있다. 삼경을 지나 막 서른 살이 되었다. 보배로운 거문고가 앞에 놓여있고 술잔에는 향기로운 술이 넘친다. 그런데 분위기는 별로 흥겹지 않다. 거문고 연주는 채 시작도 못하고 있다. 기러기 발, 즉 안족雁足을 여러 차례 옮긴다는 것으로 보아 조현調絃이 순조롭지 않다. 아무리 좋은 술인들 무엇하겠는가. 그는 쉽사리 술잔을 기울이지 못한다. 그저 잔에는 술이 넘실댈 뿐이다. 이렇듯 서른을 맞이하는 그의 심경은 처량하고 애처롭기 그지없다.
허균의 이러한 소회는 그가 살았던 조선 중기의 사회적 모순과 무관하지 않을까 싶다. 「통곡헌기」라는 글에서 허균은 당대를 이렇게 평가했다. "지금의 시대는 앞 시대에 비해서 더욱 말세이며 나랏일은 날로 그릇되고 있다." 그는 서얼 출신의 이달李達에게서 시를 배웠으며, 이십 대에는 지옥 같은 참상의 임진왜란을 겪었다. 이 때문인지 몰라도 허균의 삶은 자유분방 그 자체였다. 파격의 연속이었다. 관아에 불상을 모셔놓고 불공을 드렸다가 관직에서 쫓겨났으며, 부안 기생 매창梅窓이 죽자 애도시를 지어 분란을 자초하기도 했다.
따라서 허균이 막 직면한 서른 살은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간격을 다시금 확인하는 한편, 그간의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세월은 어김없이 흘러가는데, 자신이 꿈꾸었던 세상은 너무 멀기만 하다. 게다가 몸은 점차 쇠약해지고 아프기까지 하다. 이를 보면 「수세」는 허균의 이십 대를 결산하는 작품이라 이름 붙일 만하다. 서른은 많은 나이는 아니다. 하지만 결코 적은 나이도 아니다. 그러므로 서른을 맞이하면서 허균은 모순 투성이인 세상에 순응할 것인가 아니면 그에 맞설 것인가 고뇌를 거듭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p. 시 100-101/ 론 10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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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청춘』 2020-겨울(46)호 <고전산책 20/ 한 해의 끝과 시작은 읊은 시가들> 에서
* 정재민/ 1964년 경기 양평 출생, 육군사관학교 국어국문학과,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저서 『한국운명설화의 연구』『군대유머 그 유쾌한 웃음과 시선』『리더의 의사소통』『문예사조』『사관생도의 글쓰기』『문학의 이해』『불멸의 화랑』등, 현재 육군사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겸 교수학습개발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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