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소리
이경
바람이네요
전혀 다른 방향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옷을 빌려 입고 한바탕 춤을 추네요
갈지자로 여덟 팔자로 큰대자로
바람이 물의 옷을 빌려 입고 불의 옷을 빌려 입고
바다에 배를 뒤집고 육지에 불을 질러요
염병을 몰고 다니며 꽃밭을 갈아엎고
꽃모가지를 분질러버리네요
바람이네요 어머니
모든 바람을 휩쓸어버리는
얼굴에 마스크를 쓰고 울지도 않고 통곡하지도 않는
바람의 침묵을 읽을 수 없어요
강물에 우는 아이를 던지신 어머니
사월 바다에 든 누이와 철조망 보초에 산화한
오라비를 낳은 어머니
게으른 신을 깨워야 하나요
칼날 위에 올라 맨발로 불길을 타고 넘어야 하나요
이런 밤에도 아이가 태어나고 있어요
아이가 태어날 때 식칼을 들고 어머니도 태어나시나요
이건 어느 시대로 진입하는 입구인가요
바람이 불어요 어머니
이 낯선 바람을 읽을 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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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청춘』 2020-겨울(46)호 <근간> 에서
* 이경/ 경남 산청 출생, 1993년『시와시학』으로 등단, 시집 『소와 뻐꾹새 소리와 엄지발가락』 『흰소, 고삐를 놓아라』 『푸른 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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