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 스텍*
송소영
아이거 북벽 아래 찍혀있는
그의 단단한 오른 손바닥에서, 끝이 뭉툭한
지문 없는 손가락들이 오늘도 꿈틀거리고 있다
에베레스트 눕체봉을 향해 피어나는 불꽃처럼
그린델발트가 내려다보이는
만년설이 녹아 흐르는 폭포 앞
그 남자가 훈련 삼아 뛰어다녔을 언덕에서
나는 조금도 뛸 수가 없었다
그 강렬한 에너지, 눈빛을 따라 이곳까지 왔지만···
북벽에 붙어 있는 건조한 손을 잡고
바위를 뚫고 흘러가는 물길을 그저 같이 걸을 뿐
그는 왜, 늘 혼자서 직벽에 매달렸을까
어두운 영하 20도의 안나푸르나 남벽 28시간 등반도
외로움의 속도엔 역부족이었을까
결국 그렇게
율리 스텍은 크레바스로 수직 낙하했다
-전문-
* 율리 스텍: 2017년 4월 30일 에베레스트에서 사망한 고난도 루트의 속도등반으로 유명한 스위스 등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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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현실』 2020-겨울(82)호 <신작시> 에서
* 송소영/ 2009년 『문학 · 선』으로 등단, 시집 『사랑의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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