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줄 노트

피렌체의 역설/ 곽병찬

검지 정숙자 2021. 2. 25. 02:36

<특집 | 포스트코로나 시대와 불교/ 곽병찬_「코로나19 팬데믹의 교훈」부분>

 

    1) 피렌체의 역설

 

     곽병찬/ 언론인

 

 

  형제여, 아아,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어디로 눈을 돌려야 할까? 사방팔방이 온통 비탄과 공포에 휩싸여 있다. 이 세상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것을. 아니 이런 세상이 오기 전에 차라리 죽었어야 할 것을. 남아 있는 것이라곤 빈집과 폐허가 된 도시뿐, 사람은 그림자조차 볼 수 없고, 들판은 너무 좁아 시체를 다 묻을 수도 없고, 온 세상은 정적으로 뒤덮여 두렵기만 하구나어떻게 세상에 이런 일들이. 

- 이탈리아의 시인페트라르카의 편지, 1348년 5월, 피렌체에서

 

 

  중세 신정체제를 지배한 것은 신과 신을 대리한다는 교부였다. 대리인은 하느님의 뜻과 섭리를 앞세워 권력을 행사했다. 교구민은 오로지 교부의 말을 믿고 따라야 했다. 의심을 해서도 안 되며, 이의를 제기해서도 안 됐다. 예술은 신성을 그렇듯하게 포장하는 장식품이었으며 과학은 신의 섭리를 증거하는 광대 역할을 수행해야 했고, 철학은 교부의 메시지를 정당화하는 변사였다.

  교회와 교부의 권위가 흔들리면서 기존의 관념이나 신안, 질서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믿음의 자리에 이성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신과 신앙, 현세와 내세, 지옥과 죽음, 인간과 욕망에 대해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과학은 섭리가 아니라 인과관계를 따졌고, 철학은 신의 말씀이 아니라 인간을 탐구하기 시작했으며, 예술은 인간의 욕망을 표현했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오늘을 즐기라)."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의 시에서 따온, 고대의 이 경구가 1400여 년 만에 중세로 소환됐다. "~현명하시라, 와인도 마시고, 멀고 먼 희망은 떨쳐 버리라, 생명은 짧다. ~오늘을 잡으라(즐기라), 내일에 대한 믿음은 할 수만 있다면 접으라." 내세를 향한 소망을 빛을 잃었고, 내세를 위한 금욕은 힘을 잃었다. 세속주의 혹은 쾌락주의가 중세의 억압적 금욕주의의 균열 사이로 싹트기 시작했다.

  조반니 보카치오는 페스트가 창궐하던 1349~1351년 피렌체에서 소설의 효시 『데카메론』을 썼다. 이 책은 페스트의 대재앙 속에서 급속히 퍼진 그런 풍조를 고스란히 반영했다. 피렌체의 세 청년과 일곱 숙녀가 페스트를 피해 피렌체 교외 별장에서 머물면서 10일 동안 하루에 한 편씩 썼다는 이야기는 구성부터 파격적이다. 내용은 더 파격적이다. 성직자, 왕족, 귀족부터 도둑, 강도, 거지까지 각계각층이 등장해 외설, 비극, 풍자, 만담 등 다양한 형식으로 고귀한 자들의 위선과 타락, 성직자의 성적 욕망과 일탈을 가감 없이 전했다. 소설이 현실의 반영이라고 할 때 당시 피렌체 시민의 억압된 욕망은 이 소설을 통해 일거에 분출했다.

  이런 현상은 문학만이 아니라 회화, 조각, 음악 등 예술의 모든 장르로 퍼졌다. 그것이 폭발적으로 나타난 지방이, 역설적이게도 페스트로 피해가 가장 컸던 피렌체였다. 피렌체는 『데카메론』의 무대였으며, 르네상스의 중심이었다. 르네상스 3대 거장 가운데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부오나르티의 무대였으며, 로마에서 활동하던 라파엘로 산치오가 동경하던 곳이었다.

  다 빈치는 미술뿐 아니라 물리학, 광학, 군사학, 지리학, 천문학, 해부학 등 자연과학에서도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의 메모 속에는 비행기, 낙하산, 전차, 잠수함, 증기기관 등이 있었다. 그는 팔방미인을 소망했던 르네상스 인간의 전형이었다. 미켈란젤로는 15세기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를 주도한 조각가 화가 건축가였으며, 라파엘로는 그리스 로마의 고전적 정신을 되살려냈다. 열에 너덧 명이 희생당한 대재앙은 사람이 생명만 흔든 게 아니라 기존의 사유, 기존의 질서, 기존의 이데올로기까지 뒤흔들었다. 사람들은 새로운 질서와 새로운 세상을 모색하고, 창조하지 않으면 안 됐다. 그 시작이 페렌체였다.(p. 75-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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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교평론』 2020-겨울(84)호 <특집_포스트코로나 시대와 불교/ 코로나19 팬데믹의 교훈> 부분

   * 곽병찬/ 언론인, 서울대 인문대 미학과 졸업, ⟪한겨레⟫ 신문에 근무하며 정치 · 사회 · 문화부장, 논설위원, 대기자, 편집인 등을 역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