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시집 · 이 화려한 침묵

저축통장/ 정숙자

검지 정숙자 2012. 3. 16. 01:32

 

 

    저축통장

     -나는 군인의 아내-

 

     정숙자

 

 

  강원도 송정-

  벌써 십 수년 전의 추회다

  이사의 고생됨이야

  군인가족 모두 겪고 아는 일인데

  새삼 되읽고 싶은 생각이 없고

  그 아름다움을 관조하고 싶다

 

  꽃다운 나이에

  애기 둘을 데리고

  솔밭 속 외딴집으로

  혼자서 짐을 옮겼었지

  서방님 목소리라도 들을 양으로

  움집인 분초 막사에 들어섰을 때

  컴컴한 가운데 손수건만한 창

  교환병이 이어주는 전화기를 들자마자

  내 가슴이 미어진 것은

  서방님 목소리 때문이 아니라

  그 창으로 밀려들던 파도

  끝도 없는 바다 때문이었다

  그제사 나는 괴로움을 쓸쓸함으로 바꾸어 안고

  짐도 안 푼 집에 돌아와

  기둥을 붙잡고 울었다

 

  솔밭 속에 하나뿐인 외딴집이라

  낮이면 대문 밖에서 집을 지키는 편이

  훨씬 덜 무서웠어

  서방님은 한 달에 한두 번

  오토바이를 몰고 자정에 왔다가

  날이 밝기 전에 떠나버리는

  봉급 전달자에 불과했고

 

  여자가 혼자 살면

  쥐도 깔본다던가

  밤이면 덜컹덜컹 문 흔드는 소리

  천장에서 달리는 소리에 모골이 송연했는데

  어느 날 옷서랍을 열었을 때

  고물고물 모여앉은 새끼쥐들의 눈……

  돌이켜보면

  외로움보다 힘든 건

  무서움이었고말고

 

  그러나 지금껏

  가장 못 잊는 고장은

  사임당의 고향이기도 한

  바로 그 송정이다

  언제라도 산책할 수 있었던 해변,

  바닷바람에도 황홀스레 피던 해당화,

  오징어배들의 불빛이

  바다 가득 반원을 그리던 정경이며

  이른 아침 밀려온 해초들의 향긋함과

  모래톱 위의 새들의 발자국,

  조개껍질로 딱지치기를 하던 아이들,

  해일 이는 날의 물안개와

  잔잔한 날의 부드러운 찰싹임

  큰애는 걸리고

  작은애는 업고

  수없이 수없이 바라보던 그 모두가

  신의 찬란한 회화전이었지

 

  그렇게 몇 개월이 되었을까

  의지삼던 병사들의 교체일이 다가왔다고

  근처 과수원에서 사과를 사다가

  작별의 정을 나누었지만

  참담한 심정을

  덮을 수 있었어야 말이지

  다시 장에 나가 사탕을 사고

  개개인의 봉투를 만들어

  당일 새벽에

  “길 가다가 목 마를 때 드시라고……

  놓고 와서는

  정작 떠나는 모습은 내다보지도 않고

  종일토록 에이는 마음을

  누르고만 있었네

  그 때에도 내 안의 눈물을

  닦아준 것은

  수 천 수 만 장의 수건

  파도였던 걸

 

  그러나 그 해 크리스마스 이브는

  생애에서 가장 아름다운 밤으로 남을 거야

  나도 서방님도 이동하여 함께 살았는데

  그 분초 병사들을 초대했거든

  츄리를 만들고

  맥주를 들여오고

  나는 아침부터 찐빵을 빚고

  당시 처녀이던 동생도 불러

  카메라 후레쉬를 터트리며

  모두들 모두들 한마음으로

  밤이 깊었어

  병사들과 한덩어리된 서방님이

  참으로 멋있어 보였는데

  그런 감회도 흔치않은 낭만이었고

 

  군인의 아내 아니었다면

  무슨 수로

  그토록 아름다운 자연이며 우정을

  만날 수 있었을라고

  그러한 보물들은

  외롭고 괴로운 생활을 참는 대가로

  받게 되는 부상인 걸

  내 이삿짐 속엔

  방방곡곡의 풀꽃 한 송이, 바람 한 줄기까지

  오롯이 잔액으로 남아 있다오

 

  아, 오늘은

  송정의 파도……

  꺼내어 보며보며 해가 진다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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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이 화려한 침묵』에서/ 1993. 4. 26. <명문당> 발행

  * 정숙자/ 1952년 전북 김제 출생, 1988년『문학정신』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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