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과 사랑의 갈증/ 蔡洙永(시인, 문학평론가)
-鄭淑子의 詩世界-
Ⅰ. 프롤로그
詩는 인간 정신의 온도계뿐만 아니라 社會 변화를 반영하는 온도계 구실도 한다. 시인의 관심이 어디에 모아지느냐의 방향에 따라 각기 다른 양태의 시를 생산하게 된다. 즉 철저하게 개인적인 관심의 用處에 따라 제작되는 시가 있는가하면, 對社會관계에 관심을 집중시키는- 경우에 따라 이 둘을 혼합하는 경우도 있다. 어떻든 각기 우열로 판별할 수는 없지만, 대체 로 개인적인 관심의 영역에서 점차 사회문제를 끌어들이는 경향으로 발전한다. 사회문제를 詩化하는 데는 난점이 돌출된다. 즉 사회와 개인과의 관계설정에서 엄정한 距離유지에 실패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이는 객관화의 대상과 시인의 관계가 때로 편견의 늪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로 지적된다. 어떻든 시인은 현실 속에서 경험을 축적하면서- 이 경험을 재료로 새로운 상상력의 모티프를 만들어 나간다.
詩人은 경험층의 다양성과 특수성에 따라 관심의 다른 영역을 갖는다. 결국 시인이 살아온 경험의 모든 因子는 詩世界를 이루는 본질의 요소가 되면서 개성을 만들어 나가는 시인의 특징으로 인식된다. 경험과 경험이 융화 혹은 분열하면서 전혀 다른 변용을 보일 때, 시적 의도는 화려한 모습으로 독자 앞에 감동의 옷을 입게 된다. 詩란 인간 경험의 여러 갈래를 하나의 줄기로 구조화하는 독특성에 다름이 아니다. 결국 시인의 세계는 시인 자신의 전 삶을 하나의 장면으로 만들어 놓는 풍경화의 일이다. 이제 3번째 시집을 출간하는 鄭淑子 詩의 표정은 시인의 경험과 삶이 축도된 한 폭의 그림을 감상하는 관점으로 논지를 출발한다.
Ⅱ. 사랑의 표현
1) 삶의 진원
인간은 홀로 존재할 수 없는 갈증의 일생을 살아야 한다. 이는 宇宙調和라는 측면에서 상대적인 관계로 성립되는 이치를 대입해야 한다. 하나의 존재가 또다른 하나를 잉태하지 않는다면 존재는 허망에 젖어야 한다. 정숙자의 시는 靜的이고 평탄하다. 아울러 명상적이고 고담한 삶의 노래를 욾조리는 나지막한 톤의 시다. 이런 발상의 진원은 주로 그의 성품에서 비롯되겠지만, 경험의 여러 층들이 정숙자 시의 표정으로 연결된다.
많은 책도 아니에요
두세 권 윗목에 놓고
쉬엄쉬엄 읽으며 살고 싶어요
많은 음식도 아니에요
상추 쑥갓 호미질하며
조용 조용히 살고 싶어요
옷이야 아무려믄 어떻겠어요
크면 줄이고
작으면 늘려 입지요 156쪽
제가 참으로 원하는 것은
유리알처럼 영롱한 마음
죄 없이 저무는 하루이지요
<고독 속의 행복>에서
시인의 내면을 보여주는 담담한 표정의 고백으로, 범박하게 살면서 탈속을 염원하는 삶의 언어로 구성되었다. 아울러 자연과 더불어 살고 있는 남부여대의 평범을 꿈꾸는 탈속한 여인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치렁거리는 사치함도 가진 자의 오만함도 없는 유리알 같은 투명함의 그리움이기를 바램하는 시인의 정신 지표는 안빈낙도와 분수 있는 생활, 그리고 다가오는 고독의 물살을 쉬엄쉬엄 헤쳐가는 여인의 뉘앙스가 겹쳐질 때 작은 감동이 다가온다. 해가 뜨면 들에 나가 일을 하고, 황혼을 업고 돌아오는 평범의 꿈이란 가장 달관한 사람들의 모습이라면 정숙자의 시는 곧 시인의 정신을 담고 있다는 데서 <고독 속의 행복>은 정숙자의 정신 풍경화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이런 基底 위에서 또다른 因子를 만나게 된다.
2) 아름다움
아름답다는 것은 꾸밈이 아니고 순박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존재의 양상이다. 정숙자 詩脈은 아픔을 통해 빚어지는 사랑의 크기를 실현하기 위해 심혈을 쏟는다.
거미야
너도 명주실을 뽑을 때
아프니?
아름다움을 낳을 때
우리는 아프단다
사랑도
시(詩)도
갓난아이도
<거미에게>에서
시의 창조는 시인의 정신 水路를 통해 인간 앞에 나선다. 시가 거미줄을 뽑아내듯 아픔 없이 나오는 물건은 아니다. 고통과 고독의 함정에서 피를 흘리고 기진맥진한 어느 순간에 아름다움을 빚어 올릴 수 있다. 그렇다면 왜 고통을 지불하고 아이를 낳고, 또 시를 쓰기 위해 아픔을 감내해야만 하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사랑이라는 본질에 이르는 비유가 된다. 아이 낳는 고통도 사랑이라는 용해처에서 망각의 옷을 입고 다시 되풀이의 일을 계속하기 때문이다. 이 때 사랑은 우주의 본질로 회귀하면서 가장 확실한 감동과 만나는 동기를 제공한다. 정숙자는 아름다움을 건져 올리기 위해 고통의 수렁을 외면하지 않는 정공법의 비법을 터득하고 있기 때문에 사물의 眞髓에 쉽사리 접근하는 시의 발상법을 알고 있다.
3) 등불
시는 따스함을 건네주는 감동의 일차적인 임무가 있다. 인간을 위무(慰撫)하고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문학의 책무는, 삭막한 정서를 아늑함으로 감싸는 기능에서 소임을 다하게 된다. 감동의 진원은 비극적인 淚腺에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밝음을 남기는 요인이 훨씬 넓은 파장을 가질 수 있다. 정숙자의 시엔 밝음으로 가는 길을 확보하려는 의도가 선명하다.
당신 안에
등불이 켜지는 걸
보았습니다.
<사랑>에서
정숙자 시의 모티브는 궁극적으로 사랑을 위한 頌歌의 형태를 갖는다. 이는 인간의 마음을 따스함으로 감싸기 위한 본질을 뜻하면서 ‘당신’이라는 미지의 대상을 향한 ‘나’의 헌신은, 사랑이라는 불을 켜기 위한 생각으로 시의 行路를 잡는다. 시는 비유의 두꺼운 옷을 어떻게 명징하게 독자에게 전달할 수 있는가의 기술에 불과하다. 시인의 일차적 임무는 사물을 바라보는 통찰의 눈을 확보해야 한다. 정 시인은 당신과 나와의 距離를 틈새없이 확보하였기 때문에 ‘불’을 바라보는 정신 소통을 독자 편에 쉽게 전달한다. 결국 등불의 의미는 사랑을 위한 종착점을 향해 달려가는 정신의 중심인 셈이다. 이런 마음이 바탕을 이루어 시의 느낌을, 밝고 작은 아름다움으로 독자 앞에 이르게 한다.
4) 고독
정숙자 시의 전반적인 톤은 고독에 젖어 있다. 이는 시인의 성품에서 비롯된 내밀한 이유의 하나이겠지만, 시에 나타난 바로는 명확하게 추론할만한 단서는 없다. 다만 군인의 아내로 살아온 생활의 요인일 수도 있고, 생리적인 이유일 수도 있다면, 정 시인의 경우는 앞에서 열거한 두 개의 요인이 함께 작용하는 느낌을 준다. 어떻든 정 시인의 고독은 R.M.릴케의 고독한 느낌을 갖게 한다. 또 릴케 풍의 정서를 짙게 풍기는 여러 요인을 갖고 있다. 고독에 대한 명상이나, 가을의 스산한 분위기를 배경으로 따스함을 그리워 한 것이나, 편지를 쓰는 미지의 언어들은 릴케 풍의 짙은 음영을 남긴다.
강물처럼 희게 엎드려
멈추지 못하는 외로움 속에
차오르는 그리움
마구 쏟아져
골짝골짝 진달래 붉게 물들고
<홍조>에서
나 오늘처럼 외로운 날엔
나보다 더 외로운 그댈, 생각해
<포플러>에서
외로워하지 마세요
외로움은
외로워하는 마음을 찾아다닌답니다
<외로움의 메아리>에서
고독은 인간의 사유를 넓게 확충하는 힘을 준다. 또 고독함으로 자기 발견이라는 인식의 세계를 찾아나선다. 정숙자의 시에 고독은 물기 없이 투명한 가을을 배경으로 정신의 깊이를 찾아가는 특징이 있다. 이 또한 시인의 삶을 통찰하는 방편으로 시인의 마음에 刻印된 本性의 하나라는 생각이다. <홍조>에서의 고독은 붉은 색감으로 진실의 중심에 이르려 하고, <포플러>의 고독은 ‘그대’라는 상징 속에 시인의 감정을 옮겨 놓았고, <외로움의 메아리>엔 외로움을 벗어날 수 없는 필연적인 운명을 아파하는 인상이다. 세 편의 작품에 공통인식은 그대와 나와의
고독을 즐기는 운명적 뉘앙스가 젖어 있다. 마치 정숙자의 고독은 물기 젖어 먼 미지의 여행을 떠나는 작별의 슬픈 엘레지 같이 보인다. 특히 ‘외로움은 누군가를 사랑하게 합니다’라는 외로움이 시의 중심을 이루는 自己발견의 요체가 되고 있다.
5) 편지
정숙자의 시엔 미지의 대상에 보내는 편지가 많이 등장한다. 릴케는 평생을 통해 수많은 편지를 썼다. 문체에서나 내용에서 릴케 문학의 정신을 담고 있는 형태의 하나였다. 특히 이를 모은 『서간전집』 6권의 출간은 릴케 문학의 중요한 암시를 갖는다. 아울러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는 시의 본질을 나타내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어떻든 편지는 가장 따스한 인간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고독한 대화임에 틀림없다. 정 시인의 경우 명확한 대상보다는 미지의 그리움에 보내는 호소의 형태를 갖고 있다. 이는 정신의 고독을 위로 받으려는 일종의 갈증현상으로 보인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를 쓰고 싶어지는 밤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에서
그리운 이에게
편지 쓰는 밤은
행복하다오
<편지 쓰는 밤>에서
정 시인의 편지는 밤에 쓴다. 그리고 그 대상은 명백하게 나타나지 않지만, 그리움의 대상인 것만은 틀림없다. 밤의 시간과, 가을의 스산함과 불이 켜진 무드를 배경으로 쓰는 편지는 인간의 비극적 고독의 치렁한 슬픔을 견디기 위한 몸부림이지만, 정 시인의 경우 처절한 느낌은 다가오지 않는다. 다만 생활과 밀접한 인자가 작용하고 있는 느낌이다. “이 땅이 죄업의 감옥이래도 / 편지 쓰는 반달밤은 행복하다오“와 같이 누구에겐가 의지하려는 마음 때문에 고독의 마음을 편지에 의탁하는 시인의 생각이다.
편지 쓰는 시간은
항시 행복해
혼자여서 슬픈 날에도
편지 쓸 때엔 혼자 아니기
<항시 행복>에서
고독과 편지는 상관이 있다. 또 하나의 자기를 찾고 만나기 위해 편지는 마음을 전하는 따스함이 담긴다. 정 시인은 다가오는 외로움을 면하기 위한 방편으로 편지의 호소를 발견했지만, 실제로 우표와 더불어 찾아가는 형태가 아니라 고독을 이겨보려는 자기 위안의 방편이라는 점이다. 이런 단서는 <나는 군인의 아내>에서 그 원인이 제공된다. 강원도 송정에서 한 달에 두 번 자정에 왔다가 날이 밝기 전에 떠나는 남편을 기다리는 ‘솔밭 속에 하나뿐인 외딴집‘ 생활에서 외로움의 진원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내성적이거나 내면적인 성품으로 돌릴 수 있을 것을
같다. ‘그리운 사람끼리 쓰는 편지엔 / 한 마디 말 없이도 서로가 알지‘라는 詩語에서 정 시인의 편지는 고독을 지탱하는 중심역할을 다하는 축을 이룬다. 그러나 정숙자의 고독은 명상과 생의 深思한 철학보다는 좀더 아늑한 느낌을 주고 있음에서 릴케와는 다른 점이 발견된다.
6) 가을 162쪽
가을과 고독은 한 범주 속에 서로 다른 표정을 갖지 않는다. 상관적이고 상호 보완적인 관계로 묶이어 있지만, 고독과 가을이 유기성을 가질 때 또다른 감수성의 문을 열게 된다. 정 시인의 시엔 가을 이미지가 許多하다. 이런 현상은 역시 시인의 정신 志向과 일치하는 점이리라.
가을이 오거든 알려다오
지옥처럼 닫힌 문을 열고 나아가
끝내지 못한 마지막 한 소절
노래를 부르리니
<가을이 오거든>에서
가을이 오면 시인은 해야 할 일을 마무리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런 발상은 초조감이나 불안의 정리이기보다는 안으로 다지는 정신의 충실에 귀를 기울이는 형태를 갖는다.
그대여 가을에 오라
들국화도 발 시린 들을 질러서
둘만의 봄을 안고 가을에 오라
<가을에>중에서
가을의 정서는 정 시인의 감수성을 일깨우는 ‘행복’의 느낌을 갖게 하는 계절이다. 의식의 투명함을 안으로 받아들이면서 고귀한 사랑을 위해 정 시인의 고독은 淸淨한 하늘빛이 된다. 이런 정서는 봄에 대한 이미지보다 훨씬 많은 빈도로 가을 정서가 많다는 점이다. <가을 진행>이나 <독백>. <가을의 絃>. <이오와>, <고독 속의 행복>, <가을이 오거든>에 담겨진 가을은 정숙자의 시를 이루는 요인의 중심이자 고독한 표정으로, 시인의 내면을 이루는 일단이다.
7) 사랑
정 시인의 시에 가장 많은 시어의 빈도는 사랑이다. 결국 모든 이미지들은 사랑을 위한 정서에 집중되는 부분들이면서 별개의 의미군을 형성하는 역할을 다한다. 편지도, 가을도, 고독의 파문도, 모두 사랑이라는 요소를 향해 달려오는 이미지 군이다.
사랑은 단 한 번 창조의 기회
신이 만든 사계보다 더 곱게 타오리다.
<가을과 연인>에서
죽는 날까지 녹슬지 않을
영혼의 열쇠 사랑이기에
<침묵 밖에 줄 수 없지만>에서
이 세상
맞잡고 건너 뛸
사랑 하나
그리웠네
<철쭉 핀 날>에서
사랑하는 시인의 정신을 받쳐주는 支柱이자 중추가 되면서 시의 행보를 마련할 수 있는 필연의 역할을 다한다. 이는 헌신을 위한 布施에서 사랑은 또 다른 상상력을 자극하는 의미 군을 대동하면서 큰 무리의 「사랑」에 집중되는 형식을 취한다. 결국 정숙자의 시는 사랑을 중심 축으로 자기 인식과 자기 확보의 방편을 마련했지만 본질적인 깊이에 이르기 위한 가열성보다는 오히려 피상적인 경우가 더 많이 보인다. 인간은 누구나 사랑을 원하지만 정작 남에게 베푸는 사랑의 함량은 받아들이기를 요망하는 것보다 함량이 낮을 경우가 많다. 그렇더라도 정 시인의 사랑은 고담하고 고즈넉한 사랑을 조용하게 갈망하는 갈증현상이 흐벅하다.
Ⅲ. 에필로그
시는 시인의 정신적인 갈증을 해소하려는 현상이 있다. 삶에의 고단함이거나 인간관계의 불편함이나 또는 사랑의 감정을 일체화시키지 못할 때, 갈망의 노래를 부르게 된다. 정숙자의 시는 사랑이라는 불빛을 향해 모든 詩語들이 집중된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도 그렇고, 등불을 켜놓은 가을밤의 편지도 모두 사랑이라는 본질로의 회귀를 갖는다. 정숙자의 시는 릴케의 훈습을 받은 느낌이지만, 사물이 沈潛과 내면화의 심화에서는 다른 모습으로 자리한다. 그녀의 시는 작고 담담하면서 조용한 호소에 고독한 표정으로 머문다. 아울러 정신의 깊이가 靜的이고 溫和하려는 의도에 귀결되면서, 시의 색조는 푸른 하늘이 빠져 있는 투명한 호수를 연상한다. 아울러 사랑의 溫氣를 그리워하면서 思索을 즐기는 가을의 시인이다. N.Frye의 해석을 빌면 미토스의 시인이지만 따스한 체온을 갈망하는 점에서는 다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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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이 화려한 침묵』1993. 명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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