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클리나멘*/ 김영찬

검지 정숙자 2021. 2. 24. 22:04

 

    클리나멘*

 

    김영찬

 

 

  건방진, 이라는 이름의 방파제와 갈매기 주름살, 이라는

  묵적어가 공존한다

  두 표제는 이유도 없이 맞부딪혀

  파도의 높낮이만 따지는 관계

 

  어쨌든 입술부터 적시고 난 뒤에 살펴 볼 일

 

  빈잔

  빈속에 생소주가

  공복의 항구를 접수한다

 

  취기가 안식년처럼 어질어질

  어제 보았던 오늘은 왜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내일과

  이렇게나 닮은 것일까

  먹지도 않을 안주를 쇠젓가락으로 휘적휘적

  위장에서는

  출항을 재촉하는 뱃고동소리가 난다

 

  나뒹구는 술병과 격랑의 술잔이 엎어진 부두에

  어제 만난 청년과

  오늘 찾아온 노인은 묘하게도

  한통속일 뿐

  심폐기능의 차이를 따져볼 겨를도 없이 착시현상

  시건방진 너울의 광란에

  안경알이 부서진다

 

  볼벡(Bollwerk)**을 뛰어넘는 해일,

  낡을 대로 낡아 흘수선조차 마모된 배 밑바닥 안으로 파고드는

  파도소리

  그 곳에

  발가락 간질이는 치타델렌(zitadellen)***이 있다

 

  하릴없음의 씀씀이와 씀씀이 없는 날들이 지루하게 정박 중인

  시간

  소낙비 한 줄금 뿌려 번쩍 정신 든 가슴의 기항지에

  클리나멘의 배를 띄운다

 

  파도가 달려나와 난삽한 발자국들을 단박에 거둔다

     -전문-

 

 

 

   * 클리나멘(clinaman): 괘도에서 잠깐 벗어남, 일탈, 탈주

   ** 볼벡(Bollwerk): 방벽, 부두, 방파제

   *** 치타델렌(zitadellen): 성채 안에 또 하나 아성牙城

 

   --------------

   * 『시와표현』 2020-겨울(74/終刊)호 <이 계절의 신작시> 에서

   * 김영찬/ 2002년 『문학마당』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불멸을 힐끗 쳐다보다』 『투투섬에 안 간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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